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조선) (문단 편집) === 친정 === >'''성렬 인명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에서 물러나다''' >---- >'''[[문정왕후|성렬 인명 대왕 대비(聖烈仁明大王大妃)]]'''가 [[창덕궁 선정전|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수렴(垂簾)하고 대신을 인견(引見)하였다. >성상이 수렴 밖에 나아가니, 삼공(三公)과 시신(侍臣)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대왕 대비가 대신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전교하기를, > >>"나는 본래 불민(不敏)한 사람이다. 일찍이 서책(書冊)을 보니, 부인으로서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大王, 중종·인종)이 연이어 승하하였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하였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하였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하여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하였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歸政)[*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조선/왕사|국왕]]에게 정무를 돌리는 일. 즉, [[조선/왕사|국왕]]의 직접적인 친정 선포를 의미함.]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 >>이제 주상의 춘추가 장성하고 학문이 고명하여져서 군국(軍國)의 여러 정사(政事)를 재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귀정하고 다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니, 대신들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성상을 잘 보도(輔導)하여 태평스런 정치에 이르도록 힘쓴다면 매우 다행하겠다. 부덕한 나로서는 비록 폐습을 바로잡아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 하였으나, 잘못되는 일이 많아 끝내 그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인심에 반드시 맞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생각하여 보건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니 지금 귀정하는 것도 너무 늦은 것이다. 이 계획은 실로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내 뜻을 대신들에게 직접 말하고자 접견한 것이다." > >하니, 상이 탑(榻)에서 내려와 사양하였다. 자전(慈殿)이 분부하기를, > >>"주상이 탑에서 내려와 있으니 내가 어찌 마음 편히 여기에 있을 수 있겠소. 빨리 탑으로 오르도록 하시오." > >하였다. 상이 대비의 명을 받들어 다시 탑으로 오르고, 이어 엎드려서 사양하기를, > >>"소자는 성품이 본디 불민하고 또한 학식이 없사오니, 주야로 자전께서 보도하여 주심을 바라는 뜻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제 자전께서 뜻밖에도 승정원으로 하여금 성종조(成宗朝)의 고사(故事)를 써 올리게 하시고, 뒤이어 대신을 접견하여 귀정하고자 하시니 명을 받으매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자가 모든 기무를 어떻게 감히 홀로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였다. '''(중략)''' >---- >- '''《[[명종실록]]》 15권, 명종 8년([[1553년]], 명 가정(嘉靖) 32년) 7월 12일 (병진)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ma_10807012_001|#]].] 대왕대비였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선언한 [[1553년]](명종 8년) 7월의 명종은 20세의 어엿한 청년 군주였다. 명종이 20세가 되고 [[문정왕후]]가 스스로 [[수렴청정]]을 거두자 '''친정(親政)'''이 시작된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문정왕후]]의 간섭이 날로 심하였으며 심지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문정왕후]]는 한 나라의 [[조선/왕사|국왕 신분]]인 명종의 뺨을 때리거나 궁녀를 시켜 명종의 행동을 감시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을 비난하는 언행을 하면 곧바로 불러서 야단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명종실록]]》에서도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사관의 논평에만 등장하는 걸 보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는 사관이 논평을 하면서 [[문정왕후]]가 얼마나 기세등등하면 저런 풍문이 나오냐는 식으로 [[문정왕후]]를 비판한 정도이다. 명종을 직접 비판하기보다 [[문정왕후]]의 행동을 애둘러 비판하여 명종의 그러한 행태를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관이 실록에 기록한 내용이나 신하들 사이에서 떠도는 낭설 때문에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왕--(마마보이)--이라고 비난받는 명종이지만 당대의 문헌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될 사건을 굳이 찾자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선언하자 엎드려 울면서 극구 사양하고 신하들에게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마마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질타한 모습 정도이다. 하지만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어른이 정계에서 은퇴하는데 형식적으로나마 이를 반대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다고 여기던 시절이니 어머니의 은퇴를 반대한 건 당시에 걸맞는 예의를 지킨 것 뿐이다. 본인이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문정왕후|어머니]]의 간섭이 없어도 나름대로 정책을 수립하고 국정을 운영하였다.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정사에 크게 개입하거나 명종의 정책에 제동을 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러한 일이 있다면 [[문정왕후]]를 비판하기 위해서 개입한 사례를 사관들이 기록하지 않을 리가 없다. 눈에 띄는 개입이라고 한다면 명종이 [[윤원형]]을 지칭하여 "외척이 대죄를 입으면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하자 명종을 불러서 "주상, 이 어미와 외숙이 없었으면 왕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라고 나무란 정도가 고작이다. 왕비나 대비가 친정을 살리겠다고 하는 건 인지상정이라 이걸 근거로 비난하기는 애매하다. 하지만 왕의 말이 [[수렴청정]]을 포기한 대비에게 바로 전달되었다는 것은 [[문정왕후]]가 아예 정치에서 물러난 것은 아님을 의미하고 명종도 어머니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