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조선) (문단 편집) == 평가 == 명종은 [[조선]]의 [[조선/왕사|정식 국왕]] 중 재위기간이 짧거나 ([[정종(조선)|정종]], [[문종(조선)|문종]], [[예종(조선)|예종]], [[인종(조선)|인종]], [[경종(조선)|경종]]) 쫓겨난 임금 ([[단종(조선)|단종]], [[연산군]], [[광해군]])을 제외하면 후대의 순조, 헌종, 철종 라인과 더불어[* 댓수상 불천위로 지정 안 되는게 정상이지만 왕이 죽자마자 불천위 논의가 나오기도 했던걸 감안하면 안습.] [[종묘]] 정전(正殿) 세실에 '''불천위(不遷位)'''[* [[종묘]]에는 종법대로 돌아가신 선왕 순대로 모시는데, 차기 왕과 그 선왕이 살아 있을때 같이 모셨던 신하들로 하여 공적을 평가하는데, 큰 업적이나 종사에 큰 발전이 있었으면 5개가 지나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종묘에 모셔지는 일을 말한다. 불천위의 자격으로 종묘 정전에 모셔진 왕으로는 [[태조(조선)|태조]], [[태종(조선)|태종]], [[세종(조선)|세종]], [[세조(조선)|세조]], [[성종(조선)|성종]], [[중종(조선)|중종]], [[선조(조선)|선조]], [[인조]], [[효종(조선)|효종]],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 [[영조]], [[정조(조선)|정조]] 등 종묘 정전에 모신 총 19분 중에 14명 만이 '세실(世室)'로 정해 모셔져 있다.]로 모셔지지 못한 왕이기도 하다. 대신 1단계 급이 낮은 영녕전(永寧殿) 동협에 위패가 [[경종(조선)|경종]][* 재위 기간이 4년밖에 안 되고 자식이 없어 [[조선/왕사|왕위]]는 이복동생인 연잉군, 즉 [[연잉군|영조]]에게 넘어갔다.], 추존 왕인 [[정원군|원종]][* 원래는 정원대원군으로 부르는게 맞았으나 [[인조]]가 [[무리수]]를 두면서 기어코 왕으로 추존했다.], [[효장세자|진종]], [[사도세자|장조]], [[영친왕|의민황태자 영왕]](영친왕)과 함께 있다. 22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도 심지어 추존왕인 [[효명세자|문조]]나 [[경술국치|망국]]의 [[대한제국/황사|군주]]인 [[순종(대한제국)|순종]]에게도 밀리는[* 다만, 본래 정전에는 세실이라는 것을 정해 현 왕의 5대조까지는 모셔둔다.] 등 존재감이 없다. 원래 위패를 옮기지 않고 매년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 [[퇴계 이황]] 종가는 놀랍게도 500년이 지난 지금도 퇴계의 제사를 모신다. 사실 [[경상북도]] [[안동시]]에는 그런 불천위 제사가 1~2건이 아니다.]는 [[신하]]들이 "☆☆대왕께오서는 나라에 큰 공이 있으므로 정전에 불천위로 모시옵소서."라고 주창하고 왕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결정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명종이 후대의 신하들이나 임금에게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명종 시절에도 [[을묘왜변]]이라는 (당시로서는) 대형 침공이 있었다. 굳이 불천위로 모시자면 이걸 가지고 밀어붙이면 되는데 안 했다는 건 진짜 인정, 대접을 못 받았다는 거다. [[조선/왕사|다른 왕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핑계를 써가지고 불천위에 모시는 것과 비교해보면 판이한 부분. 하다못해 그 [[인조]]조차 [[인조반정|반정]]의 명분과 정당성을 내세워서 불천위로 모셔져 있다.] [[종묘]]에서의 대접을 생각해 보면 당대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리 좋은 임금으로 기억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남긴 행적만 봤을 때도 괜찮은 왕이었다고 여길만한 실적도 거의 없는 것이지만 [[연산군]]의 [[갑자사화]]부터 시작된 [[정치]] 혼란이 [[중종(조선)|중종]]이나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다가 명종의 친정 시절에 와서야 안정하게 되었다. 명종은 왜 [[갑자사화]]로 유명한 [[연산군]]이나 여러번 대형 옥사를 일으킨 [[중종(조선)|중종]]이나 [[문정왕후]]와 다르게 대형 옥사를 일으키지 않았나 의문을 볼 여지가 있는데 명종은 성격이 본래 순해서 옥사를 일으킬 여지가 못 되었다. 이러한 대형 옥사로 인한 정치 혼란으로 인해 결국에는 인재가 줄어들면서 관학이 쇠퇴하였고 관리 제도와 조세 제도가 문란에 빠지게 되며 옥사는 조선 사회의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에 인심을 잃어 할 수 없이 혼란한 정치의 안정을 더욱 도모해야만 했다. 명종 시기의 정치 안정은 대형 옥사로 인한 위협으로 부터 벗어나게 되어서 거듭된 [[사화]]로 피해를 입은 [[사림파]]는 지방 사학의 발달로 인해 엄청난 속도로 회복했고 결과적으로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에[*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숙청 당사자였으므로 아무리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뒤이고 어머니 [[문정왕후]]가 간섭을 안한다한들 자신의 어머니와 척을 진 [[사림]]을 기용하고 싶어도 할수가 없었다. 그래도 대세로 떠오른 사림과 척지고는 정치를 못하니까 사람에 대한 유화적인 자세로 나오긴 했다.]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결국, [[선조(조선)|선조]] 시기부터는 [[조선]] 중후기의 정치 체제인 [[붕당]]을 형성해서 정국을 이끌어 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