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고려) (문단 편집) == 평가 ==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말 그대로 도륙내고, 의종과 태자를 쫓아낸 다음 유약한 성격인 그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어느날 갑자기 임금이 되어버렸다. 일정 부분은 [[조선]] [[중종(조선)|중종]]과 비슷하지만 그 쿠데타 세력의 성격이 매우 달랐다. 그러나 적어도 [[무신정권]]의 완전 허수아비까진 아니었다. 이런 진성 허수아비 임금들은 적어도 제22대 강종 때부터였고, 명종은 그래도 그럭저럭 무신들이 서로 견제하던 심리 및 몇몇은 집권하다가 살해당하여 쫓겨나는 형편이었기에 최소한의 권력은 있었다. 하지만 명종은 무신들을 서로 견제하도록 조종만 했을 뿐, 민생에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고, 과거 급제자들의 관직 진출도 차차 막혀가고 있었던 데다 지방관들의 자질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는데 이런 문제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똑같이 추대됐지만 할 수 있는 한 권신들 틈바구니에서도 최대한 민생을 챙기고 자기 직무에는 나름 책임감을 보인 조선 중종보다 훨씬 못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쉽게 생각하면 조선 중종의 하위 열화판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런 무책임한 행태의 백미는 이의민을 불러들인 것이다.''' 경대승이 젊은 나이로 급사하면서 잠시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명종은 당시 경주로 낙향했던 [[이의민]]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이 때 이의민은 계속해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경대승이 두려운 나머지 경주로 요양을 핑계로 도망와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수도의 군부 세력을 제어하고자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경대승의 [[도당]] 잔당에 대한 문제 등이 추측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의민은 선왕 의종을 참혹하게 시해한 자인 데다 천민 출신으로 그나마 만만한 상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명종은 '''임금 스스로 이의민을 불러서 관직을 제수'''함으로써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 셈이 되었다. 그가 이의민에게 권력을 넘겨준 것도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군부(정중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문벌귀족들보다는 군부 세력이 자신을 옹호할 세력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했고, 그런 판단하에 이의민을 불러올렸던 것이다. 다만 나름의 정치적 센스는 갖추고 있었는지 초기 [[무신정권]]의 집정들이 절대로 폭주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제1대 [[이의방]] 집권기에는 중방과 [[정중부]]를 이용했고, 제2대 정중부 집권기에는 중방의 고위급 무장들과 문신들을 활용했으며, 제3대 [[경대승]] 집권기에는 [[두경승]]과 조원정을, 제4대 [[이의민]] 집권기에는 두경승을 안전장치로 마련하여 서로 견제코자 했고, 나름대로 이는 제대로 적중하여 명종시대의 무신 집정들은 후대의 [[최충헌]] 마냥 전횡을 일삼으며 폭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의민]] 대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 정국이 안정되어 이의민과 [[두경승]]이 서로 견제하면서 장장 '''13년'''동안 연립 정국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다만 이 체제는 문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명종이 국정에 대한 책임감이 없으면 적어도 이의민이라도 챙겨야 하는데, 이의민 자체도 본인의 권력이 너무 강해지자 맘을 놔버리면서 의종 저리가라 할 정도로 놀아제꼈고, 그 아들들도 너무 형편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신들 사이에선 명종과 이의민이 만든 체제 자체에 대해 불만과 의구심, 위기 의식이 점점 커져갔고, 이 기회를 최충헌이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살해한 뒤 명종과 태자를 폐위한 뒤 쫓아내버렸고 기어이 두경승까지 귀양보냈다. 이후 두경승은 유배지에서 [[의문사]]했는데 사서에서는 그의 재산을 노리고 있었던 노비가 죽였다는 설과 최충헌이 그를 살해했다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명종은 최충헌의 쿠데타에 기본적으로는 사실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문신들이 최충헌에게 암묵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면 설령 이의민은 제거했어도 두경승을 비롯한 중방 무신이 최충헌을 제압했겠지만 당시에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총체적 난국|최충헌은 이의방, 이의민보다도 독재가 심했고, 부정부패는 정중부를 아득히 능가할 정도였으며, 사조직을 만들어 국가 공조직을 능멸하는 월권은 경대승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최충헌은 모든 반대자를 제압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최충헌이 참조한 전임자들은 무신 집권자들 뿐만이 아닌, 명종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충헌은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도, 최소한의 일상 국정에 대한 파악과 시의적절한 조치들은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다. 즉 게으른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물론 최충헌의 정치는 고려의 건전한 국정 운영을 파괴했지만 아예 국정에 대한 책임감 자체를 놓아버린 명종 말기 때의 한심한 행태보다는 나았다고 여겨질 소지는 있었다. 명종 자체가 자기 보신과 현상 유지에만 심하게 급급한 문제 있는 임금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최충헌의 반란과 이후의 초법적인 통치가 정당했고, 고려 사회에 이익을 주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명종의 게으름과 무사안일, 무책임이 최충헌 일당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한 건 사실이다. 한편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 태자 왕숙은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그로부터 14년 후에 수도 개경으로 돌아와 [[강종(고려)|강종]]이 되었다. 명종을 폐위시킨 최충헌은 그의 아우 [[신종(고려)|평량공 왕민]]을 왕으로 옹립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명종은 그로부터 5년이나 더 살다가 [[이질(질병)|이질]]에 걸렸는데, 이 때 의원의 치료를 거부해 붕어했다. 그때 한 말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였다. 실제로 승하할 당시의 나이가 72세였으니 당시의 기준으로는 꽤나 장수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후사는 그로부터 이어졌으니, 신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들 [[희종(고려)|희종]]이 최충헌의 목숨을 노렸지만 도리어 실패한 후 폐위되자, 유배를 갔던 명종의 아들 왕숙이 강종으로 옹립되었고, 그 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그의 자손이 왕위에 올랐다. 덧붙여서 제34대 [[공양왕]]의 경우, 부계로는 제20대 신종의 7대손이었지만, 모계 쪽으로는 명종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