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고려) (문단 편집) == 기타 == * '''심히 유약한 성격으로 보이며, 여색을 즐기고 [[애처가]]에 [[딸바보#s-1]] 성향도 있었다'''. 애첩인 순주가 죽고 거의 반 년 후인 1180년 명춘마저 죽어버리자 [[우울증]]에 시달려 어머니 [[공예태후]] 임씨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다 들을 정도로 울어댔다고 한다. 심지어 [[후궁]]들 중에서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이미 [[시집]]간 둘째 딸인 수안궁주를 측근으로 삼아 자신에게서 밤낮으로 떨어지지 못하게 한 다음 밤에는 품에 끼고 잠을 자기도 했으며, 이 기간은 무려 5개월 가까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한지 1년만에 독수공방을 하게 된 [[사위]]가 분통을 터트리며 [[파혼]]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명종은 사위를 수창궁(壽昌宮)의 동쪽 태후 행궁에 거처하게 하며 수안궁주를 보내 남편을 위로하게 했으나, 5개월만에 딸을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순주와 명춘 및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궁 내에 불러들여서 화려한 오색 옷들을 입히고, 놀기 바쁘다보니 궁 내가 하도 시끄러워서 자연히 [[군주]]로서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경대승 [[정권]] 당시임에도 [[신하]]들이 전부 마음속으로 명종을 비난하고 수군거리며 탄식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대승]] 정권 이전의 [[정중부]] 정권 당시에는 [[음악]]이나 여색 등에 빠지는 것을 정중부 정권에서 제재했기 때문에 장형 [[의종(고려)|의종]]처럼 마음대로 노는 것도 못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중부 일가가 경대승에게 몰살당한 후에는 자유로워진 명종이 이런 방탕한 행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 《고려사》 <명종 종실 열전>에는 10명이 넘는 [[서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폐첩[* 기녀가 낳은 자식]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만큼 상당히 여색을 밝힌 듯하다. 구체적으로 “7명의 폐첩과 5명의 서얼”이 권세를 잡았다고 서술되었으며 세가에서는 5명의 후궁, 종실열전에서는 7명의 서자가 등장한다. 참고로 서자 중 한 명인 왕선사 ^^(1182년생)^^의 어머니는 1180년 이전에 사망한 순주와 명춘이 아니다. * 본인의 건강을 위해 [[잣]]을 이용해 만든 과실주인 [[백자주]]를 즐겨마셨다고 한다. 백자주는 보통 몸이 허할 때 마시면 좋다고 전해지고 있고, 수많은 고려시대 서적에서도 등장한다. 또한 한국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과실주]]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