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고려) (문단 편집) === 최후 === 명종은 폐위되고도 5년 정도를 더 생존했다. 《고려사》 <명종 세가> 기록인 1202년 9월에 폐위된 명종이 병에 걸리자 동생 신종이 신하를 보내 물었다. >신종: "의원을 보내 약을 드리려 하는데 누굴 보내 드릴까요." >명종: "난 28년 동안 보위를 더럽혔다.[* 《고려사》 원문에 '더럽혔다'고 되어 있는데, 명군으로서 통치하지 못했다고 겸양하는 표현이다.] 나이도 이미 일흔 둘인데 왜 굳이 수명을 늘리려 하겠는가." 라고 하며 의원을 거부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폐주 명종의 마지막 말이다. 결국 1202년 11월 17일, 유폐당했던 창락궁에서 죽었다. [[향년]] 72세. 제25대 [[충렬왕]] 다음으로 장수한 고려 역대 군주들 중 하나이자 그와 더불어서 유이하게 [[70대]]까지 산 고려 군주이다. 참고로 역대 고려 군주들 중 [[환갑]]을 넘긴 군주가 충렬왕과 명종 포함 총 7명으로, 충렬왕과 명종 다음으로 제23대 고종(68세) → 제1대 태조(67세) → 제11대 문종(65세) → 제22대 강종(62세) → 제20대 신종(61세) 순으로 환갑을 넘겼다. 묘호를 '명종'(明宗)이라 하고 태묘에 모셔 제사지냈으며, 시호를 '광효대왕'(光孝大王)이라고 했다. 이후 손자인 고종이 시호 '황명'(皇明)을 추가했다. 근데 조선시대 《[[동문선]]》에 실린 <명왕 애책문>(明王 哀冊文)엔 명종의 마지막을 조금 다르게 적었다. 그런데 《동문선》에서 '명종'의 묘호가 '명왕' 시호로 격하된 이유엔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고려의 묘호는 [[원 간섭기]]를 거치며 시호로 격하되었다. 그러니 조선 제9대 성종 대에 편찬된 《동문선》에 그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일 수더 있디. 다른 하나는 유교 국가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던 조선의 성종이 제후국이 묘호를 쓰는 것은 참람된 것이라 생각하여 고려의 묘호를 의도적으로 낮춘 것일 수도 있다. <명왕 애책문>은 동생 신종이 최홍윤이란 신하를 시켜 쓴 것인데 <애책문>에선 명종 광효대왕이 1203년 11월 17일에 양화궁(養和宮)에서 붕어(崩于)했다고 썼다. 또한 >'너무 늙어 직접 양위하여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가 제향(帝鄕)으로 돌아갔다.' 고 표현했다. 여기서 '제향'은 황제(명종)의 고향이 아니라 '상제(上帝)의 고향', 즉 죽어 승천했다는 뜻이다. 《고려사》와 비교하면 일단 1년 더 살았던 셈이다. 창락궁에서 붕어한 것이 아니라 양화궁에서 붕어했다. 《고려사》는 명종의 죽음을 '훙'(薨, 제후의 죽음)이라고 표현했지만 당시엔 '[[붕어]]'(崩御, 천자의 죽음. 천붕(天崩))라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명종이 태상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전무하다. 또한 명종이 직접 양위했다고 쓰여 있다. 대놓고 권신 최충헌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증거이다. 여러모로 《고려사》와 다른 것이 특징이다. 《고려사》 <예지> -국상-조 기록에 따르면 명종은 죽어서도 능욕을 당했다. 동생 신종이 형의 장례식을 치르려 하자 [[최충헌]]이 명종의 장례식을 '''국왕의 예가 아닌 왕후의 예로 치르게 한 것'''이다. 신종은 나름 반항한 것으로 보이지만 감히 최충헌을 거스르지 못했고, 결국 명종의 왕후인 광정태후의 예로 장사지냈다. 마치 중방의 무신들이 자신들이 죽인 의종을 싫어했던 것처럼 최충헌도 자신이 내쫓은 명종의 정통성이 강해지는 걸 싫어해 왕후의 예로 장사지낸 것이었다. 최충헌의 명종 격하 시도는 계속 이어졌는데, 명종이 죽었을 때 정기적으로 오던 금나라 사신들이 왔다. 신종은 [[공예태후]]의 전례에 따라 연회를 개최하지 않고, 풍악을 연주하지 않으려 했지만 금나라 사신들의 반발과 '누군가'의 암묵적인 압박 때문에 기일에 맞지 않게 큰 연회를 열게 된다. 최충헌은 마지막까지 명종을 괴롭혔는데, 명종의 장례식 날에 '''친아들이자 폐태자인 [[강종(고려)|왕숙]]이 참석하는 걸 막았다'''. 당시 왕숙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아예 오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왕숙은 부왕 명종이 죽고 11년 뒤인 1212년에야 아버지의 능묘를 참배할 수 있었다. 한편 명종 본인 사후 2년 후인 1204년에는 동생 신종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