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종(고려) (문단 편집) === 즉위 후 === 1170년 10월은 명종의 고난의 일대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명종이 옹립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신의 직위를 마구 올려 주는 것이었으며, 무신들이 만족하고 나서야 대관전(大觀殿)에 나아가 만조백관의 경하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임금]]의 권위는 이미 시작부터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었다. 1171년 10월 고려 [[만월대|정궁]]에 불이 났다. 당시 [[정중부]], [[이준의]] 등이 [[궁궐]] 안에 있었는데 불난리가 나자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까봐 궁궐을 폐쇄해버리고 나갔으며, 왕은 타버린 궁을 보고 크게 통곡했다. 이 해에 [[무신정권]]은 [[무신정변]] 주도자인 [[이고]]가 죽고 [[이의방]]과 정중부의 양립 체제로 운영된다. 1173년 맏아들 [[강종(고려)|왕숙]]을 왕태자로 책봉했다. 《[[고려사]]》는 이 해에 재앙에 가까운 가뭄이 왔다고 기록했는데 곡식이 없으니 [[인육]]을 팔고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등 나라가 엉망이 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속에 동북면병마사(고려 동북면 일대의 군대 지휘관 정도 직위) 한언국과 [[김보당]]은 선왕이던 [[의종(고려)|의종]]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로 데려오고 [[김보당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실패하고 의종은 [[이의민]]에 의해 허리가 반으로 접혀 끔찍하게 시해당했다. 1173년 10월 명종은 모든 관리를 무신으로 채우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명령을 누가 내리게 시켰는지는 뻔하다. 같은 달에 고려 개국 전설과 연관이 깊은 옥룡사 선각국사 [[도선]]의 비석을 세웠다. 이 비문에는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의 전설과 비슷한 설화가 실려 있다. 1174년 전국에서 반란이 들끓기 시작했고, [[평양시|서경]]을 중심으로 한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는데 명종은 조칙을 내려 [[조위총]]을 타일러보지만 조위총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이 해 12월에 무신정권은 무신정변 주도자이자 초대 집권자였던 이의방이 살해되고, 일족이 주멸되면서 정중부 체제로 옮겨갔다('''갑오정변'''). 1176년 국가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한 장수가 길거리에서 용호군(정규 군대인 2군 6위 중 하나) 소속 장교를 만났는데 장교는 대충 목례만 하고 갈려고 했다. 이에 장수는 분노해 장교를 감옥에 가두었는데 장교의 일당이 장수를 위협하고, 그의 집을 부수자 장수가 냅다 도망쳤다.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이 멋대로 구니 그 밑의 무신들도 [[양아치]]화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해에는 남쪽의 반란군이 기세가 커져 반란군 수장이 '병마사'(兵馬使)를 자칭했다.병마사는 고려시대 군단 지휘관급 직위다. 명종은 결국 또 군대를 꾸려 정벌을 지시했다. 1177년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는데 역시 제대로 진압이 안돼 군사를 파견했다. 또한 조위총의 잔당이 들끓어 북방이 엉망이 되는데 어떤 수준이냐면 [[금나라]]가 정례적으로 사신을 보내올 때 고려는 조위총의 잔당이 그들을 공격할까 두려워 80명의 부대를 보내 배로 호송했다. 하지만 공격을 받아 대부분 호송 부대원이 죽고, 지휘관까지 다쳤다고 한다. 이렇게 나라가 개판이 되가니 명종은 답답했는지 경령전(景靈殿)과 태묘를 참배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경령전'은 [[태조(고려)|태조]]의 진영을 걸어두고 그를 신격화한 일종의 신전이었는데 1177년 7월 명종은 직접 자신을 탓하는 글을 써서 태조에게 바쳤다고 한다. 보통 임금은 한림학사나 중관을 시켜 글을 쓰게 하며 자신이 직접 쓰지 않는다. 그래서 어필이 매우 희귀한 것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당시 이규보가 여러 산, 강, 도교의 신들에게 반란군을 잡게 해달라고 비는 축문이 잔뜩 있다. 그 중에는 >"동도(東都)가 감히 상도(上都)에 대항했으니 당신들은 신으로서 나쁜 놈들을 잡는 걸 도와줘야 됨!" 하고 협박문 수준으로 비는 축문도 있다. 동도는 경주를 비유한 것이고, 상도는 고려를 비유한 것이다. 경주의 반란을 [[제후]]국의 반란으로 비유한 셈이다. 1179년 9월, 무신정권은 무신정변 주도자이자 제2대 집권자인 정중부와 [[정균]] 부자가 참살되고, 젊은 장군이었던 [[경대승]] 체제로 옮겨갔다('''기해정변'''). 1180년 궁궐의 대문 하나를 고쳤다. 문 [[이름]]이 향복문(嚮福門, 복으로 향하는 문)이었는데 [[중방]](重房)의 무신들이 >"향복(嚮福)은 항복(降服)과 발음이 비슷하니 이는 문신들이 우리를 누르려 하는 것이다!" 라고 징징거려 명종은 이름을 고치게 해 영희문(永禧門, 길게 복을 누릴 문)으로 바꿨다. 근데 중방이 >"'복 희' 자는 좋은 뜻인데 '길 영' 자는 안 좋은 뜻인거 같으니까 우리 부서 이름을 따서 중희문(重禧門)이라고 해줘!" 라고 또 징징대자 그렇게 해줬다. 1181년 명종은 잔치를 열었는데 견룡군(왕의 [[호위]] 부대로 높은 직위의 무신들이 속해 있다.) 소속 무신들이 자기 [[의자]]를 높이고 치장해서 명종의 옥좌와 구분이 안됐다고 한다. 근데 명종은 참 속편하게 [[술]]을 먹고 크게 취해서 일어나 [[춤]]까지 추려다가 근처 [[신하]]가 말려서 못했다고 한다. 1183년 무신정권은 제3대 집권자 [[경대승]]이 병으로 죽고 천민 출신 무장이자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 체제로 옮겨갔다. 1184년 3월 경성(京城)에 [[지진]]이 났다.여기서 경성은 《[[고려사]]》 원문 기록으로 당시 [[수도(행정구역)|수도]]였던 [[개성시|개성]]을 이른다. 이 지진에 명종은 점쟁이를 시켜 점을 처보게 했는데 >'신하가 신하답지 못함(臣不臣)' 이라는 점이 나왔다. 사실상 점쟁이가 목숨을 걸고, 지진이 난 게 무신 놈들 때문이라고 비꼰 것이다. 1186년 1월 13일 명종의 조카가 죽자 왕은 저황(儲皇)과 함께 애도했다. 또 처남 [[공화후]]가 죽었을 때 [[시호]]를 내려주고 우봉군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공화후 묘지명>에는 명종을 '천자'(天子), '제'(帝)로 표현했다. >'''성수(聖壽)가 천장(天長)하시길 바랍니다.'''[* 원문은 '성수천장'(聖壽天長)인데 '성수'는 '임금의 수명'을 이르고, '천장'은 '하늘과 같이 길다'는 뜻이다.] > >'''[[강종(고려)|태자(太子)]]께선 천추(千秋)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 >'''제왕(諸王), 궁주(宮主), [[공주]](公主)는,''' >'''각자 안녕(安寧)하시길 바랍니다.''' > >'''문•호양반(文虎兩班)은,'''[* '호'는 제2대 혜종의 휘인 '무'(武)를 [[피휘]]한 것이다.] >'''충정(忠貞)으로써 보좌(補佐)하길 바랍니다.''' >---- > - 자운사 <의지대사비 비문> 중. 1192년 제작됨. 왕실과 조정의 편안함을 기원하고 있다. 1195년에 웃픈 일화가 있다. 당시 [[태자]]였던 [[강종(고려)|왕숙]]이 자신의 [[생일]]인 '천희절'(天禧節, 태자의 [[절일]])을 맞아 하례를 받고 부왕 명종을 보러 갔다. 명종은 민간에 무슨 말이 떠도는지 물어 봤다. >태자: "사람들이 모두 신을 '노태자'(老太子)[* 1152년생인 강종은 이 당시 44세였는데, 명종이 오래 재위하니 강종은 오랫동안 태자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종을 '늙은 태자'라고 민중이 놀린 것이다.]라고 웃습니다." >명종: "짐이 오래 사니 미안하구나." 명종의 말을 듣고 태자는 자신이 아주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고 실색했다. 아버지가 오래 재위했다는 걸 농담으로 던진 것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아버지 왜 오래 사냐? 난 늙은 태자 취급 받는데" 같은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1196년 2월 또 경성(京城)에 지진이 났다. 명종은 다시 점을 치도록 했고 점은 >'호령이 신하를 따라 나온다(號令從臣出)' 는 답을 줬다고 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무신들이 전횡하는 조정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1196년 4월, 무신 집권자 중 최악이자 최대의 [[권력]]을 자랑한 [[최충헌]]이 제4대 집권자였던 이의민과 그 일족을 주멸함으로써 [[역사]]에 등장했다('''병진정변'''). 1197년 명종은 고려 [[왕실]]의 일원인 왕면(王沔)을 광릉후(廣陵侯)로 봉했다. 이에 왕면은 >"[[개성 왕씨|천자의 가문]](天子之家)을 빛내겠다" 며 감사의 표문을 올렸다. 명종의 치세는 제8대 [[현종(고려)|현종]]이 만든 전성기가 어찌어찌 제17대 [[인종(고려)|인종]] 대까지 이어지다가 제18대 [[의종(고려)|의종]] 때 결국 끝장나고, 본인 대에 무너지기 시작한 시대였다. 중흥의 군주가 필요했으나 [[권신]]들의 폭정과 명종의 부족함이 충족시키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