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성황후 (문단 편집) == 기타 == * [[이사벨라 비숍|비숍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미국식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흡연]]에 남녀는 물론 미성년자 구분도 두지 않았고 [[궁녀]]들이 애연가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예 이상할 건 없다. * 남편인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초반에만 데면데면 했을 뿐 [[성관계|금슬]]이 좋았으나 정작 후손은 [[순종(대한제국)|순종]] 말고 없었다. 실제로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릴 때 죽고 순종만 장성해서 살아남았다.[* 이에 살아 생전 순종을 위한 제사 등에 아낌 없이 재물을 써서 사치했다는 말이 있다.] 이 때문인지 [[후궁]]들에 대한 [[질투]]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사실 어떤 [[왕비]]든 그럴 수 있기는 하나[* [[조선시대]]에는 [[여자]]의 질투를 [[칠거지악]] 중 하나로 여길 만큼 [[금기|금기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해도 문제삼는 것도 있다. [[혜경궁 홍씨]]나 [[효정옹주]]도 남편들의 후궁이나 [[첩]] 문제 때문에 시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질투를 안 하냐고 질책받기도 했다.]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조선/왕실|왕실]] 법도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남편 고종보다 더한 [[권력]]을 가진 [[여자|여인]]으로서 남편 고종의 다른 아들들인 [[완친왕]], [[의친왕]], [[영친왕]]의 생모들을 궁궐에서 내쫓았다.[* 고종이 후궁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성관계|승은]]을 입은 [[궁녀]]가 있으면 그 다음날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는 [[야사(역사)|야사]]도 있다. [[순헌황귀비]]는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이후에야 다시 들어왔다.] 본래 [[조선/왕사|왕]]이 죽기 전에 후궁이 그것도 왕의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 나가 사는 일은 [[조선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명성황후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근데 사실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서 사는 경우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태종(조선)|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나 [[철종(조선)|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나 [[숙종(조선)|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단적으로 그 예시를 보여준다.] * 2018년 9월 구한말 [[조선/왕실|왕실]]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에게 하사됐던 명성황후의 부채가 134년 만에 알렌 후손의 무상 기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6&aid=0010621099|[단독] 명성황후 부채 134년 만에 귀환…알렌 후손 기증]] * [[사진]]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사진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명성황후는 자신의 특집 기사를 쓰러 [[외국]] 특파원이 방문했을 때 사진이 찍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유는 1번째로 [[암살]] 위협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벽 5시까지 잠들지 않았으며[* [[조선]] 궁궐의 아침 일과가 보통 새벽 5~6시쯤 시작되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밤을 샜다는 이야기가 된다.] 침실이 여러 개 있었고 침실에도 [[비밀|비밀문]]이 있어 비상시 빨리 피신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외모]]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린 것. 하지만 [[순종(대한제국)|세자]]가 사진을 찍자 해맑게 기뻐했다는 기록, [[이사벨라 비숍]] 여사에 따르면 사진찍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사진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http://news.joins.com/article/20227|#]][* 비슷한 예로 [[이토 히로부미]]도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조선에서는 자신의 사진이 나돌지 못하도록 조치해서, [[원태우]] 의사나 [[안중근]] 의사도 목표를 특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었다.] * [[일본제국|일본]] 측의 훼손설도 있는데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명성황후 사후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사진을 찾기도 했으며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고종이 없는 사진을 찾으려고 거액을 현상금을 걸리도 없으니 [[을미사변]] 직후 일본제국 측에서 을미사변의 흔적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사진을 고의로 없앴을 수도 있다. 일본제국의 사후 대응은 뻔뻔스러운 발뺌과 시치미이었고 [[흥선대원군]]이 사주한 국내 권력 다툼으로 인한 [[쿠데타|정변]]으로 꾸미려 하였으나 실제로는 [[미우라 고로|미우라 공사]]를 주축으로 한 [[낭인]]들과 [[일본군]] [[장교]]에게 [[살해|시해]]되었다. 자기들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데 한밤 중에 목격자도 없는 후미진 곳에서 조용히 [[암살]]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 복장을 입은 인원 다수가 전투를 벌이며 일국의 [[건청궁|궁전]]에 쳐들어가 [[낭인]]들에게 둘러싸인 [[왕비]]를 공개적으로 [[살해]]했고 그 때는 해가 솟아오른 여명의 [[아침]]이었다. 수많은 [[궁녀|궁인]]들과 [[군인]]들, 심지어 [[서양인]]까지도 목격하는데서 일을 크게 벌였으니 일본제국은 최대한 은폐를 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며 그 중 한 방법으로 그날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없애거나 훼손시키고 궁녀로 둔갑시키는 한편 일본인은 조선의 왕비를 죽인 적이 없다고 시치미 뚝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증거 인멸]]을 목적으로 살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에 주한 일본공사의 명령으로 [[건청궁|궁궐]] 안에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고종도 못 찾을 정도였으니 확실하고 명확한 사진이 없는건 그렿다쳐도 명성황후를 직접 모셔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상궁]] 등 궁인들이 [[광복]]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는데 위 3개 사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다는건 이상하기는 하다. 명성황후 사진 논란 관련 내용은 다음의 기사들을 참조하면 좋다.[[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1/08/31/5741775.html?cloc=nnc|기사1]] [[http://news.joins.com/article/20227|기사2]][[https://mnews.joins.com/amparticle/21015367|기사3]][[https://www.google.co.kr/amp/mnews.joins.com/amparticle/21015367?source=images|기사4]][[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4/08/009000000200408121112121.html|기사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