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사(역사책) (문단 편집) == 의의와 평가 == [[청나라]]의 저명한 역사가 조익(趙翼)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근대의 여러 역사서 가운데 《명사》와 같이 완벽한 것은 없었다. 대개 60여 년을 경과한 다음에 일을 끝냈으니, 예로부터 역사 편찬에 이처럼 시일이 오래 걸리고 깊이 공들인 적은 없었다. 또 강희 연간에 편찬되어 전 왕조와 시간적으로 멀지 않으므로 사적(事迹)의 근원과 결말이 진실을 많이 담고 있고, 또 수십년 걸려 참고하고 정정했으며, 첨가하거나 삭제하고 분리하거나 합쳤음으로 사실은 더욱 상세해지고 문장은 더욱 간결해졌다. 또 시비(是非)가 오랜 후에 확정되어 집필자가 그 사이에 은폐함이 없어 더욱 근거 있고 신빙성 있게 되었다” >-----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 권31 <명사> 《명사》는 강희제의 주도하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정밀한 검정을 통해 위와 같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중국 관찬사서의 한계로 당시 정권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는 감추거나 왜곡했다.[* 일부 역덕들이 중국 당국이 펴내는 《[[청사고|청사]]》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중국의 다른 관찬사서들도 거의 같은 목적으로 서술된 것이다. ] 예를 들어 명나라의 신하를 자처했던 청나라의 전신인 건주위에 관한 사실을 감춘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청나라가 반란세력으로 간주했던 남명의 [[홍광제]](弘光帝),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 등 [[남명]]의 황제들을 <부전>(附傳) 속에 격하시켜 남명의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다루지 않거나 은폐했다. 특히 [[명청교체기]] 당시 청나라와 대적한 한족 지도자들이 이끈 농민봉기에 대해선 평가가 매우 나빠서 명사 [[장헌충]]전의 경우 '''장헌충이 사천의 남녀 6억을 학살했다'''는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실었으며[* 명사 장헌충전은 청나라 황제들의 의도에 따라 '수구기략(綏寇紀略)'이라는 사료에 근거하여 작성했다. 그러나 '수구기략'의 저자인 오위업은 당시 성도지현을 역임했다가 장헌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오계선의 집안사람이라 그 사실성이 크게 의심되는 사료다.] 이 때문에 '장헌충이 사천인들을 모조리 몰살시켜 사천인들의 계보가 끊겼었다'는식의 잘못된 얘기가 현대에까지 전승되어 내려오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주목할만한 특징으로, 《명사》는 24사에 포함되는 역대 사서 중 유일하게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된 《[[실록]]》이 거의 온전하게 현전한다. 때문에 다른 사서들과 달리 내용을 《명실록》의 기록과 비교함으로서 《명실록》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고 어떤 식으로 축약되었는지, 변형이 일어난 내용이 있다면 어느 내용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사실 [[명청시대|명사가 편찬된 시기]] 쯤 부터는 굳이 정사에 의존하지 않아도 정사의 바탕이 된 각종 풍부한 문헌들이 많이 남아 있을 시기이기 때문에 명나라 역사 연구에 꼭 명사만을 의존할 필요가 없고 다른 사서를 같이 참고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려사 연구 한정으로 여말선초 시기를 잘 알 수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