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사(역사책) (문단 편집) == 편찬 과정 == 《명사》의 찬술은 이미 1625년, 명사관(明史館)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풍전(馮銓)이 중심이 되어 편찬을 진행했지만, 당시 명조와 청조가 [[영원성 전투|영원성에서 대격돌을 벌이는 시점에서]] 정상적인 편찬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명나라의 관련 사료를 수집했을뿐 그외의 진전은 없었고, 이마저도 곧 중단되었다. 명나라가 아직 존속했던 시기에 《명사》를 찬술 시작했다는 것은, 정사의 편찬이 이전 왕조가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섰을 때 편찬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명나라의 운이 다했다는 프로파간다적인 성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665년, 명나라가 완전히 정리되고 나서야 [[청나라]]는 다시 명사관의 업무를 재개하도록 했으나, 당시 청의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찬수하고 있어서 다시 중단되었다.[* 《명실록》을 상당 부분 참고할 수 있었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실록이 명나라의 멸망으로 편찬되지 않아 숭정제 재위 기간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 당대의 공문서 및 저보(현대의 [[관보]]에 상응) 등의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것도 편찬 작업이 지연된 한 원인이었다.] [[삼번의 난]]이 진압되고 나서야 1679년, 《명사》의 편찬작업이 본격적으로 재돌입되었다. 청은 내각대학사 서원문(徐元文)을 감수로, 한림원 장원학사 섭방애(葉方藹)와 우서자 장옥서(張玉書)를 총재로 임명했다. 또한, 명말의 유망한 대학자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편찬 과정에서 성조 [[강희제]] 자신도 초고를 열람하는가 하면 내용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등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1723년, 총재를 맡았던 왕홍서가 《명사고》(明史稿)[* 《명사고》는 《횡운산인명사고》(橫雲山人明史稿)라고도 하는데 만사동(萬斯同)이 실질적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1703년, 만사동이 죽자 왕홍서는 만사동의 원고를 인수하여 삭제, 정정하고 합병해서 자기의 작품으로 올렸다.]를 마련시켜 놓았고, 그 후, 총재를 맡은 장정옥(張廷玉)이 이를 초고로 삼아 정리하여 1735년에 《명사》를 간행, 공포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Mingshigao.jpg|width=100%]] || || 《명사고》(明史稿)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