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면맥차관 (문단 편집) === 기술협력특별위원회의 창설과 일본의 방해 === 6월 28일, 쑹쯔원은 연맹사무국에 편지를 보내 1932년 이래 연맹의 중국에 대한 원조와 협력관계에 감사를 표한 후, 중국이 수개 성을 골라 경제재건의 시범지대로 삼을 단계가 되어 있다고 밝히고 국제연맹에서 국민정부 및 전국경제위원회와 연락하기 위한 총연락책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7월 3일, 국제연맹 이사회는 대중국 기술협력특별위원회의 설치를 가결하고 오후 이사회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4개 상임이사국과 스페인, 노르웨이, 체코슬로바키아, 중국을 기술협력특별위원회 회원국으로 결정하고 필요한 경우 비연맹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를 초청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18일, 대중국 기술협력특별위원회 1차 회의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쑹쯔원은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여 이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미국 측도 중국의 요청에 따라 주불 미국 대사관의 마리나 참사관을 옵저버로 참석시켰다. 이날 회의는 국제연맹 사무국 위생부장 루트비히 라이히만을 만장일치로 대중국 연맹 총연착책으로 선출하였다. 라이히만은 1933년 4월부터 5월까지 4차례 중국을 방문하고 쑹쯔원과 긴밀히 연락하였다. 일본 측은 라이히만을 이름난 반일가로 지목, 쑹쯔원이 술책을 부려 라이히만을 총연락책으로 선출시킨 것으로 판단하였다. 우치다 외상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구미에서 쑹쯔원의 활동을 저지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7월 25일, 우치다는 정금은행 런던지점 지배인인 노하라를 시켜 아디스에게 "일본 측을 제외하는 한 본 위원회의 설립에 반대하고 열국 측, 특히 차관단 관계국측의 위원회 참가에 찬성하기 어려운 형편이다."라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통고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일본의 맹렬한 반대 때문에 아디스는 자문위원회 참가 의사를 철회하였고 이에 라몬트도 마쓰다이라에게 참가 철회 의사를 전달하였다. 7월 29일, 쑹쯔원은 유럽 방문을 마무리하고 캐나다와 미국을 경유하는 귀국길에 올랐다. 8월 7일, 쑹쯔원은 하이드파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다시 회담하였는데 일본 측은 이에 대해 대단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일본 측은 즉각 주미 일본 대사관을 통하여 중국이 면맥차관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보장했는지 등을 질문하였다. 8월 10일, 주미 일본대사 가쓰지 데부치는 [[코델 헐]] 미국 국무장관에게 중국이 면맥차관으로 얻은 면화와 밀을 염가로 판매하고 그 수입을 각 방면에 사용하는 것은 일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달하며 중국경제 회복을 위해 국제연맹이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라몬트와 아디스가 자문위원회에 불참한 것에 대해서도 만족을 표하였다. 이에 헐 장관은 면맥차관은 미국 농산물 가격의 안정을 위한 것이며 다른 뜻은 없다고 해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