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문단 편집) === 메클렌부르크 === [[파일:메클렌부르크 가문 문장.svg|width=250]] 메클렌부르크 문장 [[12세기]] 무렵까지는 [[슬라브족]]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었지만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Heinrich der Löwe)에 의해 점령된 이후 [[기독교]] 전파 및 [[게르만족]]의 [[동방식민운동|이주에 힘입어]] 서서히 게르만화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에 살던 슬라브 부족인 아보드리텐의 부족장 니클로트(Niklot)는 30년 동안이나 저항하기도 했다. 니클로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프리비슬라브(Pribislav)는 결국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하인리히의 제후가 되는 것에 동의하면서 메클렌부르크의 영주가 되었고, 1차 대전 종전 전까지 후손들이 영주를 맡았고 아직도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 비스마르는 1229년에 처음으로 도시 지위를 얻은 후 1301년에 메클렌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뤼베크]]나 로스토크와 연합하며 메클렌부르크 영주와 힘다루기를 했고 한자 동맹에도 가입했다. 1347년에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루터파로 개종하였고, [[30년 전쟁]]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에게 저항하다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공국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공국을 되찾았으나 비스마르 등 북부 영토 일부가 스웨덴에 귀속되기도 했다. 1695년에 슈베린과 귀스트로로 갈라졌던 2개의 공국이 통합되었으나 1701년에 체결된 함부르크 조약으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로 재편성되었다. 1815년 [[빈 회의]]를 통하여 양 공국은 모두 [[대공국]]으로 지위가 상승했으며 최소한의 자치권은 유지한 채로 [[북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다. 다만 척박한 토지와 중세적 봉건 구조가 잔재한 관계로 독일 제국 시기 제국 안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다면 나는 메클렌부르크로 가겠다. 거기서는 무슨 일이든 50년 늦게 일어나니까(Wenn die Welt untergeht, so ziehe ich nach Mecklenburg, denn dort geschieht alles 50 Jahre später.")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가령 20세기 초반까지도 이곳 농민들에게는 거주 이전 및 결혼의 자유가 없었고, 거주 이전 및 결혼을 하려면 영주에게 허락을 맡아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까지도 독일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하술 참조. 두 공국은 [[1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다른 제국 내 왕/공국과 마찬가지로 폐지된 채 공화정으로 변신하고, 여전히 분리된 채로 주의 하나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진 것은 [[1934년]] [[나치]]에 의해서이다. 이후 [[2차대전]]의 패배와 더불어 [[소련군]]이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했다. 종전 당시에는 서방측이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했으나 [[포츠담 회담]]의 합의 사항에 따라 소련군에게 이 지역을 인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