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맹종(삼국지) (문단 편집) == [[삼국지(정사)|정사]] ==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한 번은 오래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모친이 한겨울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맹종은 눈이 쌓인 대밭으로 갔지만 죽순이 있을 리 없어, 죽순을 구하지 못한 맹종은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감동해 맹종의 눈물이 떨어진 그곳에 눈이 녹고 죽순이 돋아나 맹종이 그것을 끓여 모친에게 대접하자, 어머니의 병환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것이 맹종읍죽과 맹종설순이라고 불리는 고사로 24효나 효제문자도에도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12폭 짜리 이불을 만들어 어진 [[선비]]를 불러서 함께 덮게 했는데, 아들이 [[군자]]의 말씀을 듣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남양]]의 [[이숙(손오)|이숙]]으로부터 배워 그에게서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가받았으며, 처음에는 [[주거(삼국지)|주거]] 휘하의 군리를 지내면서 어머니를 [[군영]]으로 모셨고, 밤에 비 때문에 물이 새자 울면서 어머니에게 사죄하자 어머니는 노력할 뿐이고 어찌 눈물 흘릴 일이냐고 위로했다. 주거가 맹종을 알아보면서 염지사마에 임명되었으며, 맹종은 그물을 엮고 손으로 물고기를 잡아 젓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보냈지만, 어머니는 어업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어 생선젓을 만들어 부치는 것은 혐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돌려보냈고, 이후 오현의 [[현령]]으로 임명된다. 당시에 집을 옮길 수 있는 관직을 얻지 못해 절기에 맞는 물건을 맞으면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보내 항상 먼저 먹지 않았으며, 237년 오나라 [[호종]]과 [[고옹]]이 효와 충은 병행할 수 없다고 해 [[손권]]은 부모가 죽었을 때 근무지를 이탈하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든다. 하지만 맹종은 모친이 죽자 법을 앎에도 불구하고 바로 달려나가 상을 치룬 후 스스로 [[무창]]에 돌아와 감옥에 갇혀 형 받기를 청했는데, [[육손]]이 평소 그의 행실과 효성에 대해 비호하자 손권도 결국 그의 직위를 한 단계 강등시키는 선에 그쳤다. [[손권]]이 스스로 엄한 법을 만들어 놓고도 맹종을 사형하지 아니해 상황이 자못 우습게 되었으나, [[결과는 좋았다|오히려 사람들은 "그 효자 맹종마저 벌을 받다니"라며 엄정함에 놀랐고, 그후로는 누구도 그 법을 어기지 않았다.]] 258년에 [[광록훈]]을 지내 [[손침]]이 [[손량]]을 폐위하기 전에 [[종묘]]에 고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손침이 [[손휴]]에게 무창에 주둔하겠다고 밝히는 것도 맹종을 통해 행해졌다. 262년 10월에 [[어사대부]]로 승진했으며, 267년 12월에는 수승상의 직위로 관료와 중군의 [[보병]], [[기병]] 2천 명을 준비해 [[임금]]의 시신을 태우는 수레를 끌고가, 동쪽 명릉에서 [[손화]]의 영혼을 맞이했다.[* 일종의 황실제례를 주관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268년 2월에 [[사공(관직)|사공]]이 되었다가 271년 9월에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