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맥도날드 (문단 편집) === 시작과 성장 === 맥도날드의 초기 역사는 꽤나 어둡고도 독특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창업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리처드 제임스 맥도날드(Richard James McDonald, 1909. 2. 16.~1998. 7. 14.)와 모리스 제임스 맥도날드(Maurice James McDonald, 1902. 11. 26.~1971. 12. 11.) 형제이지만 맥도날드를 현재와 같은 위치로 끌어올린 기반을 마련한 것은 '레이 크록(Ray Kroc, 1902. 10. 5.~1984. 1. 14.)'이라는 [[체코계 미국인]] 사업가였다. 크록은 맥도날드의 창업자는 아니지만 맥도날드를 글로벌 프랜차이즈로 이끈 주역이기 때문에 창업자들보다 주목을 받는 인물이다.[* 비슷한 예로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가 있다. 창업자는 아니지만 중도 합류해서 새로운 시스템/전략을 구축하고 그 기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글로벌 프랜차이즈로 성장시켰다는 점이 비슷하다.] 다만 창업자 형제들도 요식업계의 판도를 바꾼 시스템을 개발한 업적이 있어, 기업 경영이 아닌 요식업쪽으로 가면 더욱 크게 주목 받는다.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던 맥도날드 식당은 지금의 맥도날드와는 많이 달랐다. [[1937년]] 형제와 형제의 아버지는 "에어드롬(The Airdrome)"이라는 이름으로 [[캘리포니아]] 몬로비아 공항 근처에 매점을 열었다. 이후 [[1940년]] [[5월 15일]], 매점을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에 옮기고 이름을 '''McDonald'''로 바꾸었다.[* 이 매점은 '''최초의 맥도날드 매점'''이 되었다.][* [[https://youtube.com/watch?v=Oc3AQk7lgTA&si=EnSIkaIECMiOmarE|#]](8분50초께), 한 샌버너디노 출신 미국인이 자신의 고향을 돌아보는 동영상에 1호점이 나왔는데 거의 폐점 수준으로 초창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참고로 이 동영상은 몰락한 샌버너디노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게토 수준이 되어버린 마을 모습이 충격적.]창업 초기인 1940년대는 [[고속도로]] 운전자들이 차에 탄 채로 즉석에서 [[햄버거]]나 [[밀크셰이크]] 등을 사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드라이브인 노점이 인기를 끌었다.[* 같은 드라이브인이지만 지금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주차장]] 한가운데 매장을 만들고 차를 매장 앞에 대면 점원이 나와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 주는 방식이었다. 아울러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롤러걸'이라 불리던 젊은 여성 점원이었다.[[https://images.app.goo.gl/oCWbJmx84oPepV3D7|#]] 롤러 스케이트를 착용하고(신속함을 위해서) 주문받은 음식을 가져다주던 이른바 [[웨이트리스]]였다. 이는 20세기 초중반 [[미국 문화]]를 설명할 때 밈처럼 등장하는 명물이 되었다. 롤러 걸은 맥도날드 고유의 접객방식이 아니라 당시 공장이나 사무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도 이와 같은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맥도날드는 지금처럼 햄버거가 아닌 [[바비큐]]를 주력 메뉴로 삼았다. 오히려 햄버거는 당시 취급한 27가지 메뉴 중 하나인 곁다리에 가까웠다. 가게 이름도 '맥도날드 페이머스 바비큐'였다. 얼마간 돈벌이가 쏠쏠했지만, 사업이 정체되자 맥도날드 형제는 사업을 재검토했다. 맥도날드 형제는 드라이브인 자체의 한계점을 파악했다. 주문하고 음식을 받는 데 시간이 걸렸고[* 이들이 주력 메뉴로 삼은 바비큐는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이다. 느긋하게 외식으로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면 테이크아웃으로는 별로 환영받는 메뉴는 못 된다.], 주문을 받을 점원들도 많이 필요해 인건비 지출이 심했으며, 고객들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메뉴도 많아서 그만큼 낭비가 심했다. 그래서 맥도날드 형제는 대대적으로 시스템을 손을 봤다. 점원이 주문을 받는 대신 직접 손님이 주문하도록 바꿨고 매출을 검토한 결과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간편하게 즉석에서 소비할 수 있는 메뉴인 [[햄버거]]와 [[감자튀김]], [[음료수]]라는 것을 파악했고 선택과 집중에 따라 과감히 메뉴를 정리하여 햄버거 위주의 라인업을 갖췄다. 가장 중요시한 변화는 바로 속도전이었다. 30분 기다려야 할 것을 30초만에 나오도록 고안한 것이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인근 공원의 테니스코트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가며 가장 효율적인 주방 동선과 기구의 배치를 고안했다. 그리고 실제 크기로 그린 전개도 위로 직원들을 보내 직접 동선을 몸에 익히도록 지시했다. 맥도날드 형제의 시스템은 손님이 직접 햄버거를 주문하고, 조리원 1명은 패티만 굽고 다른 1명은 [[빵]]을 굽는 식으로 햄버거 조리를 분업화하여 햄버거 가격과 주문한 햄버거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절반 이상 줄였다. 그리고 접시나 식기류를 제공하지 않고 종이 포장으로만 충분한 핑거 푸드를 냄으로써 비품 가격과 품을 줄일 수 있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혁신에 반발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직접 주문하고 직접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손님도 끊기고 원래대로 회귀해야 되냐고 형제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하지만 결국 고속으로 요리가 나오는 창의적인 식당으로 탈바꿈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바로 이것이 [[패스트푸드]]의 시작이다. 1954년, 50대에 [[믹서기]] 외판원으로 일하고 있던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의 식당에서 일반적인 수요 이상으로 [[밀크셰이크]]용 믹서기를 많이 구입하는 것 같아 그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맥도날드 식당에 찾아가게 되었다. 셰이크 제조기 외판원이었던 크록은 마치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이 축소된 것 같은 이 식당의 경영 방식에 감탄했고, 맥도날드 형제에게 자신이 [[프랜차이즈]] 관리를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맥도날드 형제는 과거에 자신들이 했던 프랜차이즈점의 품질 관리에 실망했던 전력[* [[새크라멘토]]나 [[피닉스(도시)|피닉스]] 같은 인근 지역에 지점을 냈지만 주방 위생이 불량하거나 임의로 팔릴 만한 메뉴를 추가하는 등의 행위가 지점들에서 나타났다.]이 있어 점포 확장에 너무 소극적이었다. 양보다는 질을 우선시했던 셈. 그러나 맥도날드의 시스템에 가능성을 본 크록은 집요한 설득 끝에 프랜차이즈 사업의 수락을 받아낸다.[* 크록의 판단력은 정확했다. 1956년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연방 도로교통법을 시행하고 미국 전국을 잇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라 불리는 미국 고속도로 개발 및 확장이 활기를 띄면서 장거리 여행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요식업과 숙박업이 크게 혜택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록은 공격적으로 점포를 늘리며 프랜차이즈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결국 맥도날드 형제와 불화가 일어난다. 1954년 전국적으로 햄버거 체인 사업을 확대하자는 크록의 제안에 맥도날드 형제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큰 현관이 있는 하얀 집이 보이지? 그게 바로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우리 집이야. 우리는 저녁마다 현관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여기 있는 우리 가게를 내려다보면서 평화를 느끼면 되는 거야. 우리는 이 가게를 운영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복잡한 구조를 만들 필요는 없어. 더 많은 가게를 내면 그만큼 더 많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을 즐기고 있고.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는 생활이야." >---- >'''- [[http://enhance.blog.me/100060442822?Redirect=Log&from=postView|Fast Second]]''' 당연히 레이 크록은 그것에 만족할 리가 없었고, 자신이 1955년에 [[일리노이]]에 설립한 첫 맥도날드 프랜차이즈점을 1호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을 시작으로 자신의 맥도날드 사업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1955 버거]]도 그렇고 맥도널드 홈페이지에 가면 연혁이 이 시점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레이 크록은 법률자문을 받아 "프랜차이즈 사업을 돕는 '''맥도날드란 이름의 부동산 회사'''"를 별도로 설립하여 프랜차이즈 사업에 관한 맥도날드 형제와의 계약을 회피하고,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점들의 토지를 소유해 사업을 장악하게 된다. 이 부동산 회사가 결국 지금의 맥도날드가 된다. 레이 크록의 맥도날드는 전국적인 사업이 된 반면 고작 점포 하나를 가진 맥도날드 형제는 결국 1961년에 270만 달러와 연 이익의 1.9%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자신들이 가졌던 원래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사업의 권리를 크록의 회사에 판다. 그러나 이익의 1.9%지급은 구두로 계약하였고 이를 증명하질 못해 이에 대해서는 한 푼도 못 받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점포에서 맥도날드란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자 'The Big M'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지만, 별 재미는 못 봤다. 그래도 나중에 맥도날드의 친선대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결국 로열티는 못 받았으니 좋은 결말은 아닌 셈. 이 일화를 다룬 영화 '[[파운더(영화)|파운더]]'가 2017년 4월 국내에 개봉했다. 작중 레이 크록 역은 [[마이클 키튼]]이 분했다. 겉으로 드러난 시놉시스만 보면 마치 맥도날드 홍보 영화, 레이 크록의 성공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실제 내용은 레이 크록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인 피카레스크 영화에 가깝다. 크록의 행보를 비판적으로 그린 것은 아니고 [[미화]]나 [[비하]] 없이 그대로 그렸는데 워낙 실제 인물이 한 짓이 있다보니 주인공 크록을 욕하게 될 수밖에 없다. 성공한 직후에 40년 가까이 함께한 조강지처와 이혼한 것, 유부남인 상태에서 나중에 아내가 되는 조앤에게 한 눈에 반한 것(자서전에서 "금발의 매력에 반했다"고 표현), 창업자 맥도날드 형제를 엿먹인 것, 맥도날드 형제가 오리지널 맥도날드 점을 넘기길 거부하자(이들은 같이 고생한 창립 멤버들에게 레스토랑의 권리와 운영을 통째로 넘기겠다고 했다) 이에 앙심을 품고 "Big M"이라고 이름을 바꾼 맥도날드 형제의 가게 바로 옆에 맥도널드 점포를 차려서 이들을 망하게 한 것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McDonald라는 이름은 당연히 창업자의 성에서 따온 것인데 어원을 따져보면 Mc은 [[게일어]]에서 ~의 아들을 뜻하며(Mac으로 쓰기도 함) Donald는 켈트어 dumno(세상)과 val(지배자)에서 온 것. 세상의 지배자의 아들이라는 뭔가 대단한 이름이 된다. 정작 이 이름을 가진 창립자 형제는 거의 패가망신했다는 게 아이러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