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매춘부 (문단 편집) === [[사람|인류]] 역사상 오래된 직업 중 하나 === 전 세계 역사와 문화를 통틀어 [[성관계|성교]]와 [[성매매]]가 빠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속성을 같이하는 매춘부 역시 형태는 저마다 달라도 그 뿌리는 동일한 형태로 인류 사회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와서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동물 연구 결과 '인간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직업]]'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실제로 펭귄이나 범고래등의 동물들 간에도 매춘이 일어난다.] 아마도 인류 종말까지 사라지지 않을 직업 중 하나. [[보노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노동을 팔아 대가를 받는다는 개념은 가장 근본적인 문명화의 단계이며, 이론적으로 사유 재산의 발생 이후 바로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꾼]], [[군인]](주로 [[용병]])과 더불어 일명 '''[[사람|인류]] 역사상 오래된 [[직업]] 중 하나'''[* [[사냥꾼]]보다 먼저 등장한 직업은 없다. 그 밖에 오래된 직업은 [[용병]] 형태의 [[군인]]이 있다. [[도둑]]과 매춘부도 오래된 직업으로 손꼽히나, 이들은 [[사유재산]]의 개념이 생긴 뒤에야 직업으로 굳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라 부르기도 한다.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롯해 구약 [[성경]] [[창세기]]에 신전 창녀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며, 심지어 [[판관기]]에 등장하는 판관 중에는 [[입다|매춘부에게서 태어난 자]]도 등장한다. 글로 된 기록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절에 만든 매춘부와의 [[성관계|섹스]]가 그려진 와인컵이 있으며 [[폼페이]] 유적에 가보면 [[고대 로마]] 시절 창녀촌이 그대로 남아있고 고객의 성감을 돋구기 위해 벽화로 그려진 성관계를 묘사한 프레스코화도 있다. 또한 [[튀르키예]]의 [[셀축|에페소(현 셀축)]]에 가면 가장 오래된 [[광고]]로 언급되는 유물이 남아있는데 매춘부의 집 방향으로 발바닥 모양을 그려 넣고 그 옆에 '여자의 마음을 사고자(매춘하고자) 하는 자는 이쪽으로 오시오'란 뜻으로 추정되는 여자 얼굴, 돈주머니, 심장 등의 그림 문자를 써놓은 석판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침팬지]]나 [[보노보]] 같이 사람과 가장 가까운 종에서도 매춘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아 아마 인류 역시 먼 석기 시대부터 매춘 행위가 이루어져 왔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기생]]이 한국에 있었는데, 기생은 매춘금지법으로 인해 공식적인 매춘부는 아니였다. 이는 일본의 [[게이샤]]도 마찬가지. 이패기생은 원칙적으로는 매춘을 하지 않지만 희귀하게 매춘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기생 중에서도 하급인 삼패기생만 매춘을 업으로 삼는다. 조선 시대의 매춘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들병이는 들병에 술을 담아 떠돌며 파는 이들이었는데 매음도 했다. 화랑유녀는 절 주변에서 매춘을 하는 여자였다. 작부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이들을 가리켰다. 기생이 매춘부인 것이 아니라 매춘부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의 구분이 무의미한 경우도 좀 있었다. 삼패기생이 그것으로, 이들은 기생인데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성접대를 하거나, 성매매를 해서 돈을 벌었다. 이런 기생을 창기(娼技)라 하여, 사회적으로는 일반적인 기생과는 달리 진짜로 천민 대접을 하였으며, 당연히 노골적으로 차별받았다. 그리고 매춘부들 중에 퇴물로 전락한 기생들이 유입되는 경우도 좀 있었다. 결정적으로 아무래도 사람을 '접대'하는 직업이였고 양반들 부터가 성적 대상으로 보아 몰래 성접대를 강요하거나 첩으로 삼아 빼돌리는 경우가 많았기에(애석하게도 현실적인 해피엔딩의 상한선이 이거였다...) 창기가 아닌 진짜 기생들도 사회적 인식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허난설헌]]이 지은 가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기방을 전전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지 않았던 시절이니, 기생은 매춘부와는 구분되는, 생각보다 좋은 대접받는 존재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좋은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사당패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매춘을 겸했다. 자세한 건 [[기생|문서]] 참고. 다만 위의 것은 민영(?)인 백성들 얘기고, 아예 법적으로 대대손손 관비(공노비 중 여자) 중에는 지방근무 발령받은 관리나 갑사들에게 배당되는 이들도 많았다. 당연히 밥하기나 빨래하기뿐 아니라 [[성관계]]도 강제인데, 신분이 [[노비]]라 [[화대]]도 못 받는다. 이는 유럽의 [[메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는 전쟁 포로가 창녀의 주 공급원이었는데 특히 이민족이 한족을 지배하던 [[북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에서 당시 지배층으로 있는 이민족 남성이 자신들의 성욕을 위해 한족 여성을 창기화시켰다. [[https://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61841054&orderClick=JAj|중국창기사]] 과거 [[일본]]에서는 [[유녀#s-2]]가 있었다. 유곽에 일하는 유녀들 중 계급이 높거나 최상급인 유녀를 [[오이란]]이라고 한다. [[성노예|자신들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인신매매|유곽에 팔아넘기거나]], [[집창촌|유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강제적으로 [[매춘]] 관련 기술과 가무를 배우면서 살았으며 강제적인 지출이 많아 스스로 빚을 갚지 못했고 [[성병]]에라도 걸리면 죽거나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유곽에서 쫓겨나 길거리 창부로 전락하는 일이 많았다. 설령 성병에 안 걸리거나 내성이 생겨 건강하게 산다 해도 27살이 넘으면 은퇴라는 이름으로 강제 해지를 당했는데 이마저도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유곽에 남아 후배를 양성하거나 오이란의 시중 담당이 되는 등 미우케가 되지 않는 한 유곽에 묶인 슬픈 인생이었다. 일본 에도 시대 때 생겨난 거대 유곽촌이자 3대 유곽(교토 - 시마바라 유곽, 오사카 - 신마치 유곽) 중 제일 유명한 유곽촌은 [[요시와라 유곽]]이다. [[무로마치 막부]] 때의 선사(禪師)였던 [[잇큐씨|잇큐 소준]]은 "입으로만 염불을 외는 [[땡중]]들보다는, 솔직하게 사는[* 말 그대로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것을 말한다.] 창녀들이 더 [[부처]]에 가깝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근대 이전 시기 유럽에서는 중세 시대때만 해도 보수적이었으나[* 중세 유럽에서는 여자가 집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가족이나 하녀를 함께 데리고 가야 했으며, 만약 여자가 혼자서 집밖으로 나돌아다니면 매춘부 취급을 받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각 도시에서 돈을 벌기 위해 [[공창제]]를 실시해 [[집창촌|사창가]]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가난하거나 [[거지]], [[미혼모]], [[강간]] 당한 후 순결을 잃었다고 집에서 쫓겨나거나, 현대와 비슷하게 [[인신매매]]를 당했거나, [[과부]][* 물론 어느 정도 돈을 벌고, 남은 아이가 있다면 이들이 다 자랐을 때 전업 매춘부 생활을 접고 다른 도시나 마을에 이사를 가 새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혹은 [[고아]]인 [[여성]]이 자립하기에는 일거리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모이게 되었다. 당시 빈민층 여성들은 같은 계층 남성들보다 더 혹독한 현실에 부딪혀야 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의 [[잭 더 리퍼]]의 희생자들을 통해 그 일면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890년 기준으로 영국의 [[메이드|말단 하녀]]가 12시간 매일 일하고 받은 '연봉'은 13파운드 정도였는데, 현대 기준으로 환산하면 1,300달러, 한국 돈으로 140만 원이 조금 넘는다. 결국 여성들이 기존에 버는 돈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이는 여성들이 [[매춘]]을 부업 또는 전업으로 삼는 큰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과거 영국 기준에서는 여성차별적인 법률에 의해 남편귀책 사유로도 [[이혼]]이 어려웠고, 이혼이 간신히 이루어진다고 해도 제대로 생계를 지원받을 수가 없었다. 예컨데 잭 더 리퍼 사건의 첫 번째 희생자인 메리 앤 니콜스의 경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이 옆집 여자와 바람이 난 후 자주 부부싸움을 벌이곤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이 간통할 경우 이혼 사유가 되지만, 남편의 경우 간통을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가정 내 폭행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이혼사유가 되지 않았기에, 니콜스는 결국 별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구빈원에 들어가서 바느질 등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니콜스 이후의 다른 희생자들도 결혼 경력이 있었지만 결혼 과정에서 큰 고생을 하고, 결국 별거에 들어갔다가 빈곤층으로 떨어진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는 [[스웨덴]]에서 지주의 집 하녀로 일하다가 식모 일을 하러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였으나 매춘에 발을 들였고, 애니 채프먼은 때때로 하녀 일을 하거나 뜨개질을 하여 돈을 벌었으나 수입이 부족하여 매춘으로 생활비를 벌충했다. 나중에 [[매독]]이 유행하면서 위세가 줄었다. [[https://blog.naver.com/alsn76/40208034845|링크]] 이때 [[영국]] 화폐는 1파운드가 240펜스였던 때였다. 1889년 기준으로 1파운드는 현대 한국 원 기준 15만 원이 조금 넘는다. 그렇게 따지면 1펜스는 650원, 4펜스는 2,600원 정도 가격이다. 그리고 당시 매춘부들이 물처럼 마시던 진 1잔은 3펜스 정도(약 1,950원)였다. 매춘부들은 당시 기준 빠른 [[성관계|성행위]]에 4펜스 남짓 푼돈(약 2,600원)을 받았고, 그 돈으로 그날 먹을 비스킷과 진을 사면 숙박비를 구할 수 없어 노숙하거나, [[영국]]의 하층민들이 이용한 2펜스 정도의 푼돈(약 1,300원)을 내고 벽가에 설치된 긴 벤치에 서로 붙어앉아 자는, [[https://gigglehd.com/gg/bbs/5768281|Two Penny hangover]]라는 간이 숙박시설 등을 써야 했다. 이건 말이 숙박이지, 그냥 달랑 야외 혹은 지붕만 있는 실내에 의자 하나와 자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벽에 걸려 있는 기대는 긴 밧줄에 기대어서 자는 준 노숙으로, 아침이 되면 주인이 밧줄을 풀어서 깨워 주었다. 심지어 Penny sit-up이라고, 반값이지만 대신 기댈 밧줄도 없고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자야 하는 곳도 있었다. 숙박비를 벌지 못한 많은 매춘부들이 이런 식으로 잠을 자야 했다.[* 이러한 생활패턴은 매춘부들의 건강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잭 더 리퍼]]의 2번째 희생자인 애니 채프먼의 경우, 부검 결과 폐와 뇌에 질병이 퍼져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고작 몇 달 정도밖에 살지 못했을 상태였다.] 19세기 말부터 1900년 무렵 [[런던]]의 가장 저렴한 숙박업소에서 침대 하나를 하룻밤 빌리는 데 지불해야 하는 가격은 4펜스(2,600원)에서 6펜스(3,900원) 남짓이었다. 매춘부들이 한 번의 [[야외섹스|야외 매춘]]으로 번 돈은 개인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2펜스에서 4펜스 정도였다. 이러한 시세의 영향으로 당시 퍼진 속어가 twopennies upright, 2펜스를 주고 담벼락에 기대 선 채로 매춘부와 하는 [[성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야외섹스|야외]]에서 적당히 으슥한 곳에 가서 유방과 성기 정도만 노출하고 잽싸게 끝내는 [[착의섹스]]로, 저렴한 만큼 질도 낮은 서비스이다. 그 당시 [[매춘|성매매]]의 종류도 다른데 [[낮]]에는 봉제나 모자제조 등의 일을 하고, [[밤]]에 [[부업]]으로 성매매, 반대로 낮에 부업으로 세탁이나 재봉일을 하다가 밤에 '보통 매춘부(common prostitute)'로 일하는 성매매, 주부매춘 등 다양했다. [[http://www.thep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72|기사]] 예나 현대나 평균적인 체형이나 외모가 동떨어져 있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성격이라 사회성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매춘부들을 찾았는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경우 친구가 있다면 이들의 소개를 받고 가기도 했다. 당대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97869|예술인]] 중 음악가 중에 그런 경우가 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70478.html|기사]], [[https://blog.naver.com/hurkle97/90159844127|링크]], [[https://www.inews24.com/view/1299128|기사 2]] [[발레]]가 유행했을 때 수석 [[발레리나]]나 프리마돈나가 되기 위해 연습하지만 수준이 낮은 발레리나들이 매춘부가 되기도 했다. [[http://www.thep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72|기사]]. 이는 선술한 현대의 [[걸그룹]] 등 [[연예인]]과 마찬가지이다. [[영국]]의 [[조지 시대]] 중 [[섭정]](Regency) 시대[* 1811년~1837년.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정신병으로 왕세자였던 [[조지 4세]]가 대리 통치한 시기. 리젠시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에서는 매춘부를 오페라 걸(Opera girl), 라운드 힐(Roundheel)이라고 한다고 [[한나 스웬슨 시리즈|블랙베리 파이 살인사건]]에 나오는데,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유럽권에는 이런 고급 매춘부와 귀족들의 정부를 의미하는 [[코르티잔]]이 존재했었다. 법적으로 허락되었는가 불법인가는 국가마다 다르지만, 어느 쪽이든 사회적으로 시선이 곱지 않다. 과거에는 비자의적으로 뛰어들거나 당장 돈이 궁한 등의 사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에는 [[선진국]] 중심으로 그냥 돈을 쉽게 벌려고 매춘부가 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다. 단 [[인신매매]]로 인해 본인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강제로 매춘부가 되어버린 케이스, 특히 [[미성년자]]나 [[장애인]]인 경우라면 분명 문제다. 이에 대해선 [[인신매매에 관련된 괴담]] 참고. 한편 단순히 '돈을 받고 [[성관계|섹스]]를 해주는 여자' 라는 사전적인 정의를 사용할 경우 사실 크나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김완섭]]은 <창녀론>이라는 책에서 여기서 [[화폐|돈]]을 단순히 현금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선물, [[명품]] 같은 유형자산이나 [[식사]] 같은 편의 행위 제공까지 확장하여 일반적인 [[연애]]나 정상적인 [[결혼]]마저도 매춘부와 같으므로 '모든 여자는 매춘부다'라는 극단적으로 비약적인 논리의 주장을 하여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공산당 선언]]을 보면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이런 식의 표현을 한다. 다만 엥겔스는 여자가 나쁜 것이 아니라 여자나 남자나 죄는 없는데 [[결혼]]의 과정과 그 순수한 사랑을 매춘에 가깝게 타락시키는 사회의 구조가 나쁜 것이라고 한다. 김완섭의 발언에 비하면 매우 민주적이고 있을 수 있는 의견이지만 이것 역시 진지하게 걸러 볼 필요가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매춘에 대한 언급이나 엥겔스의 저서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에서 다룬 가족-일부일처제 가족-의 기원에 대한 해석은 기본적으로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당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앙시앵 레짐]]을 지지하는 왕당파나 신분제 지지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까지 포괄한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재산의 공유를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아내도 공유하고 난교나 즐기는 타락하고 방종한 이들이다!" 라고 인신공격하는 경우가 많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에 대해 "너희는 아내를 너희가 가진 재산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아내도 공유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아내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등한 관계로 보고 존중하기 때문에 가족 문제와 공산주의가 관계있다고 보지 않는다!" 라고 나름 재치있게 받아친 바가 있었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의 유럽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동등하지 않았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도 거의 불가능했으며 (본 문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여성이 독립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지려고 하면 (아주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매춘부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었던 것. 극단적으로 말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아냥처럼 아내를 마치 재산처럼 여기는 태도 역시 없다고는 할 수 없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나온 주장들을 현대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