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국 (문단 편집) ==== [[만주사변]] 발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만주사변)] [[1927년]] [[일본군]]은 [[국민당의 1차 북벌]]로부터 일본 거류민과 권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차 산동파병]]을 단행했다가 외교적인 문제로 철수했지만,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진행되던 와중인 [[1928년]]에 2차 산동출병을 단행,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면서 [[제남 사건]]을 일으켰다. 제남 사건 자체는 흐지부지하게 끝났으나 일본은 만몽분리정책을 추구하면서 만주와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일본의 권익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고모토 다이사쿠]] 등 강경파는 만주로 퇴각하던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 [[장쭤린]]을 [[황고둔 사건|암살]]하는 등 극단적 수단까지 서슴지 않았으나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선택하면서 날아갔고 만몽분리정책을 추진하던 [[다나카 기이치]] 수상도 [[황고둔 사건]]을 처리하다가 덴노의 분노를 사서 날아갔다. 하지만 관동군의 일부 과격파 장교들은 여전히 이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과격파 장교들은 내부적인 문제로 당면한 경제 위기와 국내의 사회 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바로 대외적 모험 정책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이 때 [[대공황]]으로 도탄에 빠진 농민들에게 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국방사상 보급 운동'을 통해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보라며 "국내에서 눈을 외부로 돌려야 한다.",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 그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좀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선동했고, 국가적으로는 일본 농민 50만 명쯤 만주로 이주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1930년 말에는 만주 재류 일본인의 수가 22만 8,700명에 달해 해외에 거주하는 최대 일본인 집단이 되어 사실상 일본 내지의 과잉인구를 배출하는 배출구 구실을 하였고, 그들은 이미 만주의 절대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일본의 만주 점령 계획은 어디까지나 소련에 대한 일본군의 전반적인 작전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 중 하나일 뿐이였다. 이를 위해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 [[이시와라 간지]]가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결탁, 이미 침략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음모로 [[류탸오후 사건]]이 일어났는데 육군 중앙부에 통보된 것은 18일 심야의 일이었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은 19일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관동군은 사건 발생 18시간 만에 봉천(심양), 안동, 장춘, 우장 등 남만주철도 지대의 중요 지점을 모조리 석권해 버렸다. 또한 관동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하야시 센주로]]의 [[조선군(일본제국)|조선 주둔 일본군]]은 국경을 넘지 말라는 중앙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21일 만주로 진입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사변 불확대와 국지 해결 방침안을 결의하였다가 사건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추후 승인하는 형태로 관동군에게 질질 끌려다녔다. '''당시 정부가 군에 대한 견제력을 잃은 것이며, 군 중앙에서도 관동군을 통제하지 못했다.''' 이렇게 군대가 정부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현상은 관동군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군대 조직에서 관습이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일본의 졸전과 패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장 육군과 해군이라는 엄연한 한 나라의 정규군들이 서로 다른나라 군대들처럼 적대를 한 끝에 육군에서 자체적으로 해군 전력을 키운다고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개발하는 미친 사례까지 등장할 정도이니. 자세한 것은 [[만주사변]]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