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국 (문단 편집) ==== 남만주철도회사와 관동군 ==== 만주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과 '''[[관동군]]'''이다. 만철은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어 1907년 4월을 기해 남만주철도를 관동도독부에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경비하기 위해 새로 창설된 6개 독립수비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다. 만철은 이름과 달리 일개 철도회사가 아닌 그 이상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만주 버전에 가까웠다. 실제 업무 범위는 철도 경영 외에도 광업, 해운, 항만, 부두, 발전, 숙박, 창고업, 제철, 조사 활동에 이르며, 출자 회사, 조성 회사, 지방 시설, 교육시설까지 포함한 식민지 경영을 위한 일본의 실질적인 국책 회사이다. 실제로 1923년 이후 패망까지 일본 제국 전체의 모든 법인 중에서 자본금 규모 1위의 법인이었다. 일본 3대 재벌 못지않은, 그보다 더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었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가 50% 지분을 가진 회사로 시작했다가 이후 100% 보유한 사실상의 국책 기업이 된다. 이 때문에 만철 성립 당시부터 초대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 입에서 "만주는 영사, 만철, 도독부의 이른바 3두 정치가 될 가능성이 있어 통일성이 결여될 것이고, 여기에 육군과 해군까지 가세하면 5두 정치가 될 우려가 있다." 하는 말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일본 해군]]과 [[일본 육군]]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만주에 해군은 얼씬도 못했고 육군에서도 사실상 독립하여 [[대본영]] 직할이였던 [[관동군]]이 육군의 개입을 배제하고 만주를 지배하였다.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관동군의 폭주는 고토 신페이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영역. 결과적으로는 신페이가 예측한 영사, 만철, 도독부에 관동군이 추가된 4두 정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 때문에 '만철 총재는 관동도독 밑에 있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도독부 고문으로서 외무대신의 감독 아래 도독부의 행정 일체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만주 경영 및 행정에 개입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만주 경영 외에 만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조사부를 통해 관동군의 [[씽크탱크]] 기능이었다. 만주 경영 초기에 만철은 '동아경제조사국'을 설치하여 25년간 중일관계와 동아시아 전반, 나아가 세계 경제 전반의 동향 조사 및 연구를 맡았다. 이 자료들은 이후 만주국 성립에 없어서 안될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성립과 함께 '''관동군의 정책 입안 부서''' 구실을 하며 '경제조사회'에 흡수 된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사 범위는 [[유럽]]까지 확대, '대조사부'로 확대되었다. 조사부는 인원이 2천명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이었으며, 예산 규모가 대폭 확대되면서 파격적인 대우에 매혹된 [[제국대학]] 출신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사실상 일본 제국을 대신하여 현대의 [[정보기관]] 및 [[씽크탱크]]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은 총리 산하에 [[내각정보조사실]]이란 정보기관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대기업의 정보네트워크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그 연원을 따져올라가면 만철조사부에까지 이른다. 2차대전 이후 만철조사부 출신들은 대부분 대기업 특히 [[종합상사]]의 정보계통으로 많이 흘러들어갔다. [[관동군]]은 1919년 관동도독부가 폐지되고 관동청이 설치되면서 관동주 방위와 만철선 보호임무를 목적으로 하는 독립된 재만 군사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철도 수비뿐만 아니라 일본의 만주 권익 보호, 대소 전략 수행의 주체로서 임무를 점차 담당해 나갔던 것이다. 이 병력은 만주사변 전에는 2년 단위로 교체 파견되는 주차사관과 6개 대대의 수비대대를 합쳐 약 1만 400명에 지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