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만주 (문단 편집) === [[한민족]] === [[한국어족]][* 비교언어학으로 [[고립어]]로 속한다.]의 [[한국어]]를 쓰는 민족. 지배적인 종교는 없다. [[한반도]]의 지배민족이면서, 과거 만주 일대의 원주민 중 하나였다. 한반도 외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사할린 섬]]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만주 및 한반도 북부를 기원으로 하며, 만주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추정되는 [[고조선]]을 세웠다.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이탈과 흡수가 반복된 요동 지역 정도를 제외하면 [[북부여]], [[동부여]], [[북옥저]], [[고구려]], [[두막루]], [[발해]] 등의 [[예맥]] 계열 (후대의 한민족) 국가가 내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천년 가까이 지배했다. 특히 [[고구려]]는 요동의 패권을 쥐고 중원과 대등하게 겨룬 첫 번째 국가라는 정치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직계후손이라 할 수 있는 및 한국계 국가들 말고 여타 유목민족들도 고구려와의 직간접적인 계승의식을 내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근대 [[일본 제국]]마저도 고구려를 들먹이며 만주 지배를 정당화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하지만 10세기경부터 유목민족들의 대대적인 발흥과 함께 발해가 멸망하며 한국계 정치집단의 지배적인 헤게모니는 무너졌고, [[발해부흥운동]]마저 실패한 이후 한민족의 정치체는 한반도로 그 영역이 축소됐다. 심양왕같은 특이 케이스도 있었고 고려 말 [[제1차 요동정벌]]로 일시적인 진출에 성공했으나,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던 당대 국내외 정세의 한계로 만주 진출은 결국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국계 정치집단의 영향력이 발해 멸망 이후 만주에서 일소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직접 지배는 실패했으나, 한반도 국가들은 유목 세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한반도의 생산력과 인구 수를 바탕으로 만주 지역의 부족간 정치 지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역 강국]]으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특히 금 건국 이전이나 금 멸망 이후 ~ [[영락제]] 이전까지 여진족이 부족 사회로 지내던 시절 부락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은 고려-조선이 쥐고 있었으며, 수많은 여진 족장들이 고려-조선에 조공했다. 한국계 국가들 또한 답례를 내리거나 각종 정벌을 벌이며 여진 부락들의 지배권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창업군주 [[이성계]]가 무장이던 시절 함흥의 [[전주 이씨]] 가문은, 세력권이 근거지인 함경남도에서 만주 중부 지역까지 걸쳐 있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만주의 부족들이 이성계 [[가별초]]의 일원으로 동원됐고, 그 중에서는 훗날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아이신 기오로 가문]]도 포함됐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수많은 만주 부족장들이 조선 왕실에 예를 표하고자 한양으로 상경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나라 또한 요동 반도 일대를 제외하고서는 여진족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는 조선에 맡겼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만주에서 발흥하는 유목 국가가 중원을 넘볼 정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주에 대한 한반도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야만 했다. [[여요전쟁]] 이후 금나라의 성장,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의 성장이 그 예시이다. 심지어 [[원나라]]마저도 [[동방 3왕가]]의 견제를 위해 [[심왕]]이라는 직위를 고려 왕실에게 맡기기도 했다. 달리 보자면,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이 반중적인 한반도 통일국가의 탄생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중국 동북 지역의 안보는 한반도 국가, 또는 한반도를 지배하는 세력의 대중국 성향에 크게 좌우됐고, 이는 곧 베이징으로 대표되는 중국 수도권의 안보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 외, 발해부흥운동 시기 유민부터 시작해 고려 시대 난민 등이 후손을 이루며, 여전히 적지 않은 수가 만주에서 터전을 이뤘다. 그러다 조선 후기 시기에는 청나라의 등장으로 인한 만주의 성지화와 북방민족에 대한 조선의 우위가 붕괴된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이 조선 전기 때보다는 약해진다. 근대에 다가서는 19세기경 한반도에서는 [[맬서스 트랩]]이 일어난다. 이 시점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난민들이 본격적인 만주 재이주를 시작한다. 조선 정부 또한 여전히 직접적인 지배는 실패했지만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대한제국과 청나라 간의 국경 분쟁]]이 보여주듯 만주 진출을 완전히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의화단의 난]] 당시 러시아가 15만 대군을 만주에 진주시키고 청나라가 확연히 약화되자, 대한제국은 요동을 포함한 남만주 일대를 지속적으로 침략했다.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던 이 분쟁은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대한제국군은 야전에서 연대급 규모의 청군을 박살내곤 선양 일대까지 관리를 파견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면서 대한제국 자체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1909년 [[간도협약]]이 맺어짐에 따라 한반도 국가의 만주 재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민족의 만주 이주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주로 농업이나 장사를 위해 중국령 만주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향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이러한 이민은 1945년 일본의 패망 때까지 이어져왔다. 또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과 [[경술국치]]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이런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정착촌들을 중심으로 재편하여 항일 운동을 이어나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지청천]]의 [[한국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그리고 이용과 [[김홍일(군인)|김홍일]]의 [[대한의용군]] 등.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들은 이들에게 숙식과 정보, 그리고 인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일본을 등에 업은 [[장쭤린]]의 [[봉천군벌]]이 탄압을 벌이고, 일본이 서서히 손을 뻗으면서 내만주의 독립운동은 점차 위축됐다. 연해주도 마찬가지로, 1922년경에는 러시아 내전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소련 극동이 어느 정도 안정화됐다. 거기다 1930년대 [[만주사변]]이 벌어지면서 주요 항일 세력들은 중국 관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로 다시 이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한인들은 지역마다 분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역사에 스며들어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 '''[[조선족]](중국)''' 중국령 내만주에 있는 이들은 [[조선족]]이라 불리는데, 구한말부터 농업이민으로 넘어갔거나 항일운동을 위해 넘어간 조선인들 중 1945년 해방 이후로도 귀국하지 않고 남은 이들의 후손이다. 주로 [[평안도]] 및 [[함경도]] 출신이지만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의 조선족들은 특이하게도 한반도 남부의 [[경상도]] 출신이 다수이다. 이들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국가와 분리된 한국계 '중국인'이 된 것은 1949년 국공내전 종결 이후로, 그 이전의 만주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의 본토 조선인들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큰 영향을 끼친 소수민족이기도 하다. 원래 옌안의 [[중국 공산당]]에는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분포해 있었다. 한편, 만주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만주 조선인들은 1945년 이후 한반도로 자신들을 돌려보내려 하는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역시 중국 공산당에 대거 가담했다. 이들은 만주 전역에서 국민당군의 진격을 저지,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여세를 몰아 난징을 함락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에도 이후 다수의 조선인 부대들은 [[연안파]]를 구성하여 [[북한]] 정부 수립에도 참여했고, [[한국전쟁]]에서도 침략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연안파는 정통성이 부족하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일인 독재 체제를 세우자, 고려인 계통의 소련파와 마찬가지로 숙청됐다.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에게 매우 큰 도움을 준 소수민족이었기에, 중국 최초의 자치구를 얻어내는 등 초창기에는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연변 자치구는 곧 자치주로 격하됐고,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는 여전히 중국 내부에서 나름 잘 사는 민족에 속한다. 북한의 쇄국으로 인해 교류가 줄어드는 반면에 한국과의 교류는 증가하는 추세이다. [[지린성]]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및 [[장백 조선족 자치현]]에 다수가 모여 살고 있으며 그 외 도시에도 많이 거주한다. 지배적인 종교는 한반도의 한국인들처럼 딱히 없다. 이들의 [[중국 조선어]]는 [[동북 방언]](함경도)과 [[서북 방언]](평안도)의 영향력이 강하다. 현대 들어서는 한국과의 교류 증가로 인해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력도 강해지고 있다. * '''[[고려인]](러시아)''' 러시아 지역에 있는 이들은 [[고려인]]이라 불린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령 극동으로 이주했던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러시아의 연해주 개발 당시, 이들은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대한제국과의 무역을 이끌면서 연해주에 생필품을 공급하여, 러시아 제국의 극동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으로는 이들 역시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면서 레닌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고 백군을 일본이 지원하자,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적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백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민족주의 세력은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살해당하거나 상하이로 떠나면서 와해됐다. 이후 1930년대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소련 극동이 일본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자 스탈린은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쫒겨났다. 이 때문에 현재 이들은 구 소련을 구성하던 여러 공화국들 전역에 분포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러시아]] 수도권에 특히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원 정착지였던 연해주 지역에 남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강제 이주 이후 소련에서는 중앙아시아 농업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만주 작전 이후 [[소련군정]]의 실무자로 대거 참여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도 소련파란 이름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여타 다른 파벌들처럼 [[8월 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구소련 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이들 또한 민족적 종교는 없지만, 종교를 믿는다면 대부분 주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 언어는 함경도 [[동북 방언]]의 일파를 사용했지만 중심이 되는 민족 자치구역이 없었기에, 현대 들어서는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일부는 조상의 언어인 [[대한민국 표준어]]를 배우기도 한다. * '''[[사할린 한인]](러시아 사할린 섬)''' 한편 사할린에 있는 한인들은 고려인과는 좀 다른 [[사할린 한인]]이라 불린다. 이들은 1940년대에 [[일본령 가라후토|일본 제국령 사할린]]에 노동자로 강제 [[징용]]되어 갔다가 1945년 일본이 철수하고 사할린이 소련에 넘어간 후에도 [[무국적]]으로 남겨진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일본이 패전했기에 이들의 일본 국적은 말소됐지만 한국 또한 두 쪽으로 갈라졌던 것. 소련과 북한은 이들에게 북한 국적을 주려 했으나 사할린 한인들은 이를 거부했는데, 이들은 평안도, 함경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고려인이나 조선족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서 넘어간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는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었지만 [[제주도]] 출신도 일부 있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은 소련과 적대 관계였던데다 소련은 남한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이 남한 국적을 딸 수도 없었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 무국적으로 남겨졌던 것. 이주 배경도 19세기부터 농업과 정착을 목적으로 이주했던 고려인과 조선족과 판이하게 다르다.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민단|민단계]] [[재일교포]]와 그 기원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일부 1세대 사할린 한인들은 창씨개명의 영향으로 일본식 이름을 썼던 경우도 있다. 종교는 주로 [[러시아 정교]]를 믿는 편이다. 언어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쓰이는 [[서남 방언]] 및 [[동남 방언]]의 일파를 사용하지만, 소련 시절의 영향으로 인해 표기는 북한 [[문화어]] 식으로 했다. 하지만 타 지역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들어서는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지고 있다. 2세 이후로는 [[러시아어]]를 주로 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