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문단 편집) === [[한족]] === [[중국티베트어족]]의 [[중국어]]를 사용하는 민족. 지역 방언으로 동북 [[관화]]를 사용한다. 내만주, 즉 동북 3성과 3시 1맹 지역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해당 지역들의 인구 수를 합치면 9000만 명을 상회한다. [[유교]]와 [[국가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지배적인 종교는 없으나, 그래도 [[불교]]는 여전히 교세가 꽤 되는 편이다. 전국시대 연나라가 최초로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며 고조선 세력을 밀어냈고, 한나라 시기에는 아예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한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북방 유목 민족 세력을 거쳐 다시 고구려로 대표되는 한민족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후에는 천 년 가까이 요하 동쪽의 만주에서는 직접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사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 요하 동쪽의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곧바로 발해에게 대부분의 영역을 빼앗겼다. 요서 정도만이 수당시대 때 확실한 지배권으로 통치됐으며, 당 멸망 이후 등장한 송나라는 아예 요서를 넘어 회북 일부까지 잃고 방위에도 급급해진다. 본격적으로 한족이 만주에 세력을 재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다. [[명나라]]는 요서와 요동 일대의 군사적 요충지를 통해 유목 제국을 견제하고 북방 국경을 안정화 시켰으나 그 이북은 여전히 전부 퉁구스 및 몽골계 민족들과 일부의 한민족 유민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청나라]] 건국 이후에도, 만주는 청 황실에서 보낸 일부 [[한족]] 이주민을 제외하면 청조 내내 봉금 지역이었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 증가와 약해지는 행정력은 점차 봉금령의 붕괴를 일으켜 [[틈관동]]이라 불리는 이주 행렬을 만들었고, 19세기 말 봉금령이 완전히 풀리며 만주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원(그중에서도 산둥성 일대의) 한족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해 현재는 만주의 주된 민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만주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이를 기반으로 한 2차 산업, 넓은 처녀지에서 행해지는 농업은 수많은 한족 이주민들을 유입시켰다. 당시 만주를 기반으로 한 [[봉천군벌]]은 동3성 병공창 등의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을 정도였다. [[만주사변]]으로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잠시 넘어가기도 했으나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영역으로 돌아왔고, 중국 공산당은 이 지역의 소수민족들과 일본의 유산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재편, 원정 온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천하를 쥐었다. 그 이후로도 내만주는 확고한 중국 세력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현재는 원주민들의 유출 및 한족으로의 동화로 인해 현재 내만주에서 한족 비율은 90%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만주의 중심인 [[헤이룽장성]]의 한족 비율은 96%이며, 일부 지역에서 소수민족 자치지역이 있으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한족이 절대 다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