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리장성 (문단 편집) === 근현대 === [[파일:만리장성 방어전.jpg]] 1933년 [[열하사변]] 당시 만리장성에 배치된 [[국민혁명군]]. 20세기에도 만리장성은 중국 현대사에 계속 영향을 끼쳤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의 [[열하사변]] 때 베이징을 점령하려는 [[일본군]]과 방어하려는 [[국민혁명군]]이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과 산해관에서 격전을 벌인 것이다. 결국 [[1933년]] [[1월 30일]] 산해관이 함락되었고, 만리장성 산악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끝에 중국과 일본은 그해 5월 탕구 협정을 체결하여 휴전하였다. 조약에 의거하여 만리장성 하북 구간은 일본군 관할이 되었고, 장성 남쪽 100km 지역은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베이징 (당시 지명은 베이핑)은 일본군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4년 후의 [[중일전쟁]] 당시 본격적인 교전 개시 후 불과 5일만에 베이징이 함락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만 중일전쟁이 점차 중국 중남부로 확산되며 화북 지방의 일본 주둔군 수가 줄어든 틈을 타 [[팔로군]]이 만리장성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국공내전]]초기에도 만리장성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직 양당간 휴전협정(쌍십협정)이 맺어져 있던 1945년말 국민당과 공산당은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만주로 병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국민당은 [[산해관]]을 장악하고 당연히 공산당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기 떄문에 화북에 있던 공산당의 병력은 장성밖을 넘어가 내몽고를 통과해 만주로 가기보다는 [[산동반도]]까지 이동하여 뱃길로 [[요동반도]]로 건너가 만주로 내륙으로 들어갔다. [[장제스]]는 해군사령관 [[천사오콴]]에게 이동하는 공산군이 탄 배를 격침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천사오콴은 휴전협정을 깰 수 없다며 불복종했고, 결국 해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결국 1946년 국민당이 선공함으로써 국공내전은 재개된다. [[국부천대]] 후 [[장제스]]가 중화민국 해군력 우위를 강조하며 '바다의 만리장성'은 반드시 유지될 것이라 선언한 바가 있다. 다만 이것도 2000년대 이후로는 중국측이 해군력에서 중화민국을 압도하고 있다. 현대에는 [[항저우]] 만에 세워진 [[항저우만 과해 대교]]가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과해 대교였으나, 2018년 개통한 [[광둥]]만의 [[강주아오 대교]]에 타이틀을 넘겨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