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리장성 (문단 편집) === 진-한 시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대 장성.jpg|width=100%]]}}} || || {{{#gold ''' 중국 서북 돈황의 고비에 있는 만리장성 시작부의 유적으로 한나라 시기에 건설되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고대 중국에는 성벽을 쌓는 방법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벽돌을 쌓아 만드는 방법이 아니었다. 흙과 건초 반죽을 번갈아가며 쌓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을 '''판축기법'''이라고 한다.] '''}}} || [[전국시대]]에 [[조(전국시대)|조나라]],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 [[진(통일왕조)|진나라]] 등 세 나라가 쌓은 장성을 [[시황제|진시황]]이 통일 이후 연결해 지은 것이 시초이다. 당시 주관자는 [[몽염]]이었다. 하지만 이 장성은 진나라의 붕괴와 함께 한동안 역사의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한나라]]의 [[한무제]]가 한 번 더 대규모 공사를 해서 장성의 위치가 이전되었으며, 그 길이도 진나라 시절보다 길어진다. 그 이후 [[후한]]대까지는 잘 유지되어 왔지만 후한 말 이후 사회 혼란과 분열로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서서히 무너져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명나라 시대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완성되었다. 현재 부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의 장성을 말한다. 진대와 명대 장성은 위치도 상당히 달라서 사실상 다른 장성이다. 오늘날에도 진-한 시대에 쌓은 장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진시황이 연결해서 지은 장성은 지금의 벽돌이 아닌 흙을 이용해 지은 토성의 형태였고 높이도 높지 않은 데다가 지켜야 할 영역이 워낙 넓다보니 감시도 소홀해서 사람이나 말이 맘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곡괭이 등으로 성벽을 허문 다음에''' 우르르 몰려가서 만리장성 아래를 개박살 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나라 다음 왕조인 [[전한]] 시기만 봐도 한 고조 [[한고제|유방]]부터 [[한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북방의 [[흉노]]에게 [[백등산 포위전|관광당하기에]] 바빴고, 삼국시대와 [[서진]] 시대를 거쳐서는 북방이 전부 5호 등의 북방민족의 손에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등 숱하게 황하 이북을 북방민족에게 넘겨줬던 시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것의 효용성 자체에는 큰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도 많다. 사실 따지고 봤을 때 정말 철옹성 같은 방어를 생각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했다면 손 안 쓰고 떡 먹으려는 놀부심보나 다름없다. 해자, 창검벽, 외곽성벽, 이중성벽 등등 온갖 방호시설을 떡칠해둔 성일지라도 함락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달랑 성벽 한 겹 둘러놓고 군대의 침공을 막아내겠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시기 만리장성의 용도가 북방 기마민족의 남침에 대한 방어선이 아니라 동•서 교역을 하는 상단을 보호하는 역참과 내몽골과 중국을 가르는 국경선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길목을 통제하고 대규모 적의 침공을 최소 지연시키거나 최대한 방어해내는 것으로서 만리장성은 그 가치를 충분히 해냈다. 그 역할을 할 자연적 지형이 부족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즉 만리장성의 역할은 철옹성 같은 방어요새의 구축이 아니라 경계의 구축이었다. 실제로 [[백등산 포위전]] 이후 [[한고조]] 유방과 [[흉노]]의 [[묵돌선우]] 간의 협상에서 만리장성을 흉노와 한나라 간의 국경으로 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리장성이 유목민의 침공을 발견하고 잠깐이라도 지연하는 동안 후방에서 방어를 위한 기동군을 편성하거나 거점의 요새화를 하는 등 실질적인 방어 준비를 할 수 있지만, 장성이 없으면 그럴 시간조차 못 버는 것이다. 역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성이라는 단어에 매달려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경계를 만드는 일은 만리장성 외에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이다. 가장 비슷한 사례로 [[이란]]의 [[사산 왕조]]가 [[중앙아시아]]의 [[훈족]]과 [[에프탈]]족, [[튀르크]]족을 막기 위해 북동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쌓았던 '고르간 장성'이 있는데, 이는 만리장성이 있는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견고한 장성이었다. 이외에 [[픽트족]]을 막기 위해 로마인들이 쌓았던 브리튼 섬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나 코린토스 지협에 쌓은 헥사밀리온 등이 있다. 중국은 의외로 평야인 지역이 아주 많다. 특정 방어 거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만 뚫으면 중국은 영토 자체가 워낙 거대하여 허허벌판[* 전체적으로는 산지여도 그 지역의 평야 면적이 한반도 수준이거나 전국 팔도 중 하나랑 맞먹거나 하는 수준. 평야가 여간한 국가에 맞먹는 넓이였다. 그래서 그런 산지에 사는 사람들조차 다수가 다 평지에 도시 건설을 해서 평지인이나 마찬가지였다.]인 경우가 대다수다. 만약 장성이 없었다면 화북은 유목민의 침공 및 약탈에 더 시달렸을 것임이 자명하다. 즉 만리장성은 유목과 농경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화북과 몽골고원에는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어선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경계선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삼아서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을 구분해둔 것이다.[* 실제로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살았던 지역인데도 만리장성을 쌓은 다음에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비록 마음만 먹으면 만리장성을 돌파하기는 용이했으나, 대군이 통과할 길목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로 인해 만리장성은 마치 강과 같은 방어능력을 보여주었다. 강가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해서 무적의 방어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작전 지역을 우회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하므로 방어의 효과는 충분한 것이다. 실제로, [[명청교체기]]때 청나라는 이미 만리장성을 돌파할 수 있었으나, 만리장성을 돌파한 다음에는 보급선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침공하기가 어려웠다. 보급선이 끊기면 작전기한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나라의 침공은 산해관을 통과한 다음에나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항복하여 산해관의 통제권을 청군에게 내어주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9Igjfy5ylk)]}}} || || {{{#gold ''' 만리장성의 다큐멘터리 '''}}}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