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력제 (문단 편집) ==== 그 외의 낭비 ==== 만력삼정 진압에 든 비용만큼이나 만력제의 무덤 건설 비용[* 800여만 냥, 명나라 국가예산의 2년분에 해당한다.]은 엄청났다. 깊이 67 m, 총 면적 1,200 m²나 되었으니. 게다가 자녀에겐 더 후했다.[* 본인이 [[장거정]]에게 거의 학대라고 봐도 무방한 훈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반발해서 자녀들에게 관대했으며 아주 돈을 퍼발랐다.] 황태자와 황자의 책봉비와 혼인비로 930만 냥, 의복비 등으로 280만 냥, 대략 1,200만 냥을 사용했다. 그것도 [[임진왜란]] 직후이자 양응룡의 난이 진압되지도 않은 1599년이었다. 이쯤 되면 만력삼정은 핑계로 보인다. 태창제 때 풍부한 내탕금을 근거로 만력제 때 재정이 흑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풍부한 재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세금 증액 때문일 뿐이었고, 은광에 부여된 '광세(鑛稅)의 화'로 그 결과 소주(蘇州)와 산동의 임청(臨淸) 등지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맞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황제가 일을 안 하니 이런 낭비를 막으려는 어떤 정치적 개혁이나 보완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 심지어는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는 지방에도 광세를 물렸다.] 게다가 장거정부터 시작해서 당대 명나라 문무백관들은 심각하게 부패하여 백성들한테 어떻게든 뜯어먹을 궁리나 하니 궁중 유지비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만력제는 광세를 효율적으로 부과하지도 못했다. 광세사들이 궁중에 바친 돈이 대략 300만 냥 정도였는데 그 외 광세사가 600만 냥, 수행원이 900만 냥, 광세사 휘하 깡패 무리가 1,200만 냥을 각각 착복했다고 한다. 농민들이 매년 83% 이상 세금을 더 착취당한 셈이다. 결국 만력제의 광세는 농부들이 세금을 지불할 능력을 잃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호부가 징수하는 국가의 조세가 대폭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여기에서 병력을 풀어 광세사 휘하의 깡패들만 정리했어도 세금이 줄줄 새는 것만큼은 크게 막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광세의 폐단은 당대 조선에도 알려져서, 당대 조선인마저 "광세로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하지 못하다"고 디스하고 산동 어사의 주본을 베껴 조선 조정에게 그 심각성을 보고할 정도였다. >이 기고(李旗鼓)가 역관에게 말하기를 천조의 태감(太監)이 광산 개발과 점세(店稅) 문제로 금주위(金州衛) 지방에 나와서 가혹하게 수탈하며 갖은 못된 짓을 다하므로 저자 백성들이 원망과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행상 달자(行商㺚子)를 사주하여 태감을 꽁꽁 묶어 작은 우리에 가두고 출입하거나 음식도 들게 하지 않아 장차 굶주리고 목말라 죽게 되었으니, 매우 우습다. 일은 이렇게 되었지만 이것이 어찌 당신 나라에까지 미칠 리야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환관을 보내 재물을 모으는 행위가 정당하지 못한 징수이긴 하지만 저자 백성들이 태감을 묶어놓고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인심과 풍속이 극도로 한심합니다. 연방(椽房)에서 얻은 산동도 어사(山東道御史) 요사인(姚思仁)의 주본 1본을 베껴 올려보냅니다. 요사인의 주본은 다음과 같다. >광산 개발과 점세(店稅)로 천하가 소란한데 이 일은 종묘사직의 안위와 관계됩니다. 성명께서는 조정의 의논을 널리 채택하시어 빨리 정지령을 내림으로써 인심을 수습하고 국운을 유지하소서.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황상(皇上)께서 등극하신 지 20여 년간 백성을 상처난 사람 돌보듯 하시고 백성을 자식처럼 보호하셨으므로 천하가 바야흐로 간절히 태평성대를 바라며 불세출의 임금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인이 이익을 말하여 성상을 미혹시키면서 처음 광세(礦稅)로 유도한 결과, 기보(畿輔)·산동(山東)·섬서(陜西)로부터 민월(閩越)·광동(廣東)·강서(江西)·절강(浙江)에 이르기까지 거의 다 채굴하였고, 점점 극변 요해지인 요동(遼東)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점세(店稅)로 유도한 결과, 천진(天津)·임청(臨靑)으로부터 호구(湖口)·광월(廣粤)까지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점점 교화가 미치지 않는 면전(湎甸)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산 유곡까지 파급되었습니다. > >그리하여 심산 유곡까지 샅샅이 그물을 쳐 놓고 온 천하 대지 위에 함정을 파 놓은 뒤 장사하는 백성들의 골수를 착취하니, 그들은 하소연할 길이 없고 무신(撫臣)·안신(按臣) 역시 가슴을 치고 분노하면서도 누구 하나 감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비는 그 아들을 보전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그 아내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고금에 걸쳐 이러한 행동과 이러한 상황을 간직하고도 종묘사직이 오래도록 편안하여 무사한 적이 있었습니까. 온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누차 상주하였어도 성지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언관으로 있으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종묘사직이 근심되므로 삼가 국가 안위의 대계를 황상을 위해 극언하겠습니다. > >근년 이래로 하늘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하며 재물은 고갈되고 백성은 곤궁한데, 강회(江淮)사이엔 몇 년째 내리 큰물이 지고 양림(梁林)의 사이엔 천리 들판이 거북등처럼 갈라졌습니다. 인심이 흉흉하여 모두 난리 일으킬 생각만 하는 판에 광산을 채굴하고 점세를 징수하는가 하면, 거기에 무변(武弁)으로 하여금 사태를 악화시켜 남의 집을 허물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며,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생명을 해치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장사꾼이 물건을 지고 저자에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경우까지 있으니 도적보다도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전하는 말에 짐승이 궁하면 달려들고 백성이 궁하면 난리를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불령한 천하의 간웅(奸雄)들이 모두 날뛰고 기세를 부려 틈을 타서 일어날 텐데, 기보에서 기병하면 천하의 복심이 위태하고 중원에서 기병하면 천하의 허리가 끊어지고 강회서 기병하면 천하의 인후가 끊길 것이고 강서·절강·민월·광동에서 기병하면 천하의 지체가 부러질 것이니, 순식간에 토붕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황실 창고에 금은 보화가 하늘에 닿을 만큼 쌓였을지라도 국가의 멸망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 >그리고 천하는 황상의 천하이고 인민은 황상의 인민입니다. 재물을 황실 창고에 쌓아놓은 뒤에야 황상의 재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용을 황실 창고에서 가져다 쓴 뒤에야 황상의 비용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역(周易)》에서 사람을 모으는 것을 재(財)라 하였고, 《대학(大學)》에서는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녹대(鹿臺)에 재물이 모이자 은(殷)나라가 폐허로 되었고, 채장(彩藏)이 채워지자 한(漢)나라 사직이 위태해졌고, 경림(瓊林)에 재물이 쌓이자 당(唐)나라가 쇠퇴해졌고, 낙구(洛口)에 곡식이 가득차자 수(隋)나라가 멸망하였습니다. 고래로 역대의 군주가 악착같이 재물을 거두어들여 아침 저녁으로 액수를 헤아리면서 산더미같이 쌓아두고 후세 자손을 위해 계획하였지만 그 자손은 한 푼도 써보지 못한 채 간웅·도적의 밑천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 >삼가 원하옵건대, 황상께서는 "사람을 모으는 것이 재물"이라는 《주역》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백성이 흩어진다는 《대학》의 경계를 곰곰 되새기고, 녹대와 거교(鉅橋)를 전철로 삼고, 경림과 대영(大盈)을 거울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광산개발·점세·시박(市舶)을 담당시키기 위해 파견한 여러 중사(中使)들을 전부 소환하시고, 체포되어 치죄된 군수·현령 등을 모두 관대히 용서하시고, 각부(閣部)의 대신을 불러 함께 정무를 보소서. 그리하면 떠났던 천명이 다시 돌아올 것이고, 원망하던 인심이 다시 기뻐할 것이며, 위태로왔던 종묘 사직이 다시 편안해질 것이니, 만세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이 틀림없이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1602년 만력제가 지병으로 죽을 지경까지 가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광세를 모두 폐지하고 쫓겨난 이를 모두 복권한다.'는 어명을 내려 풀리나 싶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쾌차해서 전날 내린 명령을 뒤엎었다. 심지어 황제를 도와 광세를 물리던 환관들도 반발했으나, 거기에 더해 [[자금성]]에 건청궁과 곤녕궁을 확대하여 중건하라는 명을 내렸다. 궁전 건축의 결과 총 930만 냥이 들었는데 당시 명나라의 2년 예산을 웃도는 금액이다. 심지어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누르하치]]를 대비하기 위한 군비가 모자라 황제 개인 계좌인 내탕금에서 이를 충당하자는 신하들의 의견[* 황제 개인이 가난했으면, 신하들이 이런 의견을 내지도 않는다. 당시 만력제 개인 재산이 [[명나라]] 국가 예산을 웃돌았다는 사실을 신하들이 인지했기에 이런 의견이 나올 수 있었다.]까지도 거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