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력제 (문단 편집) === [[만력 3대정|만력삼대정]] === [[임진왜란]] 이외에 지방의 이민족들을 억누르기 위해 군사를 많이 움직였는데, 이 중 큰 3가지를 '[[만력 3대정|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 한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묶어 만력동정(萬曆東征)으로 부르는데, 이 기간에 다른 두 정벌도 연달아 일어났다. *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내몽골|오르도스]](鄂爾多斯)의 발배(哱拜)가 반기를 들었다. *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는 귀주(貴州)·파주(播州, 명대 [[쓰촨성|사천성]] 지금의 [[구이저우성]])의 세습 된 선위사(宣慰使) 양응룡(楊應龍)이 반란을 일으켜 1600년에 진압당했다. 만력 20년(1592) 영하 지역 [[몽골]] 출신 부총병이었던 발배(푸베이)가 아들 발승은, 양아들 발운 등과 세력을 규합하여 영하의 난을 일으켰다. 발배는 몽골 달단의 장수였다. 가정 연간에 달단의 왕이 부친과 형을 죽이자 100명의 무리와 함께 영하의 [[명나라]] 군영으로 투항했다. 당시 명나라는 북방의 [[만리장성]]을 따라 군사 주둔지를 9곳에 설치했다. 그곳들은 구진이라 했다. 영하는 몽골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영하진과 고원진 2곳에 설치했다. 몽골은 명나라의 숙적이었다. 명나라 황제 영종이 몽골에 참패하고 끌려가 치욕을 당한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명나라 조정은 뜻밖에도 발배가 투항하자 그를 우대했는데, 이이제이의 전법으로 몽골의 세력을 억제할 속셈이었다. 명 조정의 의도대로 발배는 전공을 쌓아 도지휘로 승진했으며, 만력 연간에 이르러서는 유격 장군, 부총병 등의 직책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만력 17년(1589)에는 발배의 직책을 발승은이 세습했다. 이때 발배 부자는 몽골에서 망명한 부족들을 은밀히 규합하여 사병을 양성했고, 명군의 군기가 문란한 것을 보고 반란의 마음을 품었다. 만력 19년(1591) 조주에 일어난 반란을 기병 3천 명으로 평정하는 공을 세운다. 그러나 그를 시기한 순무 당형과 [[명나라]] 관헌들은 발배 군한테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오히려 사사건건 방해하였다. 결국 [[피꺼솟]]한 발배는 만력 20년(1592) 3월 마침내 자신과 의형제를 맺은 [[한족]] 유동양, 허조 등과 함께 병력 4만 8천 명을 이끌고 순무 당형과 명나라 관헌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발배는 하투[* 지금의 [[내몽골]] 서부와 영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영하 지역에 독립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반란군은 하서 지역의 47개 보를 점령하고 [[황하]]를 건너 하투 지역으로 진출하여 섬서성 전 지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고변을 접한 신종은 대신들에게 반란을 진압할 계책을 요구했다. 병부상서 석성은 "황하의 제방을 일시에 터뜨려서 반란군의 핵심 근거지인 영하성 안의 반란군들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하성은 황하 유역에 있기 때문에 수공 작전으로 성을 함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사 매국정은 "백전 노장 이성량을 영하로 보내 반란군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사중 왕덕완이 이성량의 복직을 완강히 반대했다. 너무 부패했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이성량이 거느리던 요동 군대의 막강한 전투력이 절실히 필요한지라, 이성량 대신에 그 아들 이여송을 총병으로 임명하고 영하로 보냈다. 감숙순무, 엽몽태,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이 영하로 출정했다. 만력 20년(1592) 6윌 위학증의 지휘 아래 매국정, 엽몽태, 이여송 등이 이끄는 명의 대군이 영하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영하성의 반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위학증은 1달이 다 지나도록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종이 분노하여, 위학증을 파면하고 엽몽태에게 지휘권을 넘기면서 엽몽태가 수공 작전을 펴게 했다. 엽몽태는 영하성 주위에 물샐 틈 없는 긴 제방을 쌓고 난 뒤 황하의 물을 끌어들어 성 안으로 쏟아지게 했다. 이여송도 하투에서 반군을 구원하러 온 몽골 기병을 물리쳤다. 성 안의 반란군은 양식이 떨어지고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지만, 명군은 쉽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마침 기름장수 이등이라는 자가 나타나 매국정이 쓴 서찰을 각각 발승은과 유동양 허조에게 보내 이간질시켜, 발승은이 그 둘을 죽이고 명군에 투항하자 발배는 자살했고 반란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는데 실패하여[* 특히 변방의 요새인 중위(中衛), 광무(廣武), 옥천영(玉泉營), 영주(靈州)가 발배의 반군에게 함락당했다.] 병력 4만 명과 대포 400문을 동원해서 7개월이 걸려 겨우 진압했다. 이 반란을 진압하느라 명은 [[은]] 200여만 냥을 소진했는데, 은 200만 냥이면 명나라 6개월 국가 예산에 해당된다. 참고로 [[일조편법]] 이후 어림잡아 파악한 명의 1년 국가 예산이 400만 냥이었다. 명나라 자체를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단순 [[충치]]였을 때 [[치과]]에 빨리 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이가 썩어서 감염되기 직전까지 되자 수술비로 1년 연봉의 반을 날린 것과 같다. 또한 [[명나라]] 서남 지방의 파주[* 지금의 [[귀주성]] 쭌이]에서 [[묘족]]의 수장이자 파주선위사 양응룡이 난을 일으켰다. 사실 명나라 역대 조정은 서남 지방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파주에 선위사를 설치했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선위사의 우두머리, 선위사는 소수민족의 족장을 임명했는데 소수민족을 회유할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파주의 선위사는 지역 족장인 양씨 일족이 대대로 세습했다. 그들이 중앙정부를 대신해서 파주 지역의 통치를 시작한 시기는 [[당나라]] 말기까지 올라간다. 당 대력 5년(770) 산서성 태원 출신 양단이 파주에서 할거한 이래 양씨 일족이 무려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에 이르는 29대 800여 년 동안 관직을 세습하여 지역 패자로 군림했다. 융경 5년(1571) 양응룡이 부친 양렬의 관직을 세습했다. 그런데 양응룡은 서남 지방의 명나라 관군들이 군기가 빠지고 전투 경험이 없는 약졸임을 간파하고는 그들을 멸시하며, 언젠가는 스스로 독립하여 서남 지방의 왕으로 군림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그의 저택은 왕궁을 흉내내어 호화롭게 그지없었고 심지어 수하에 환관을 두어 왕처럼 위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는 걸핏하면 사람을 죽여 위세를 과시했으며 다른 토호들을 억압했다. 나중에는 그가 애첩이 이간질한 말을 곧이듣고 처와 장모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이 때문에 처숙부 장시조가 양응룡의 만행을 견디다 못해, 명나라 조정에 양응룡이 저지른 행패와 그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양응룡을 체포하기로 결정했고 만력 27년(1599) 귀주 순무 강동지가 도지휘사 양국주에게 관군 3천여 명을 이끌고 가서 양응룡을 토벌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양응룡은 이를 눈치채고는 묘족을 규합하여 반란을 이르켰고 위계로 그를 토벌하러온 양국주의 관군을 삼백략으로 깊숙이 끌어들어 그들을 역으로 전멸시켰다. 양응룡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기강[* 지금의 사천성 중경시 남부]을 공격했다. 유격 장량현이 기강성 사수를 결심했지만 이미 8만여 명이 넘는 반란군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기강은 반란군에게 함락되었고 성안의 [[관군]]과 백성들은 모조리 살해당하며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양응룡의 반란 세력이 14만에 달할 정도로 커지자 신종은 크게 당황했다. 마침 명군이 조선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귀국하고 있어 그들에게 양응룡 토벌을 명령했다. 그래서 만력 28년(1600) 호광과 천귀 총독 이화룡의 총 지휘 아래 명나라 대군 20여만 명이 8개 방면에서 출정했다. 특히 이때 신종은 [[군비]]가 모자란다는 말에 자신의 [[내탕금]]을 풀어서까지 군비를 지원해주었으며, [[조선]]에서 전투 경험이 많았던 총병 유정의 군사가 선봉에 서서 반란군을 토벌했다. 유정의 별명이 유대도였는데[* 무게가 120근이나 되는 크고 무거운 대도(언월도와 비슷한 무기)를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반란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반란군은 유대도가 나타낸다는 소리만 들어도 도망가기 일쑤였다. 명군의 반격으로 참패한 양응룡은 병력 1만 7천 명으로 요새인 누산관[* 지금의 [[귀주성]] 귀주시]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양군이 114일 동안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유정의 군사가 양응룡이 저항하던 누산관을 함락하여 반란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양응룡은 애첩 주씨, 하씨와 함께 자결했고 양응룡의 다른 가족들도 포로가 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이로써 양씨 일족의 29대 800년 세습 통치가 종말을 고했고 파주는 명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다. 그러나 명은 이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는 데에 실패하여 무려 11년이 걸렸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비용만 해도 은 150만 냥이 들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명나라 국가 예산의 37%가 날아간 것이다.] 이렇게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 즉 영하의 난 + [[임진왜란]] + [[정유재란]] + 양응룡의 반란 진압에 들어간 돈이 은자 1,200만 냥이 넘어가는데, 이때 명나라의 1년 전체 국가예산이 은자 400만 냥에 불과했기에 결국 명나라는 재정 적자가 심각해진다. 특히 만력삼대정뿐만 아니라 활동이 거세진 [[여진족]], [[몽골족]]들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대부분은 지배층의 착취와 횡포, 갈수록 무거워지는 세금을 견디지 못해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이런 민란에 농민뿐만 아니라 유랑민과 제때 급여를 받지 못해 탈영한 병사들, 도적 집단까지 가세하여 세력을 갖춘 반란군이 되자, '민란 따위'라고 무시할 수가 없을 지경까지 왔다.] 막기 위해서 명나라는 매년 전체 국가 예산의 3분의 2를 국방비에 퍼부어야 했다. 그리하여 재정은 파탄났고, 이로 인해 가뜩이나 약해진 군사력도 더욱 약화되었으며, 결국 [[장거정]]이 땜빵해 놓은 북로남왜가 부활해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장거정]]은 일단은 부패하긴 했어도 일은 멀쩡하게 처리해서, 명나라가 어느 정도 돌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만력제 시절에는 '''황제가 태업'''하였다. 외부적으로 북로남왜 및 여러 반란군의 창궐도 문제도 문제지만, 내부적으로 부정부패나 매관매직 역시도 판을 쳤기에 명나라의 [[국가 막장 테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