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력제 (문단 편집) == 기타 == * 당시 만력제가 재위할 당시 [[대월]]은 [[남북조시대(동음이의어)#s-3|남북조시대]]로 치열한 전쟁 중이었다. [[후 레 왕조|여씨]]와 [[막 왕조|막씨]]가 대립하는 와중에 막씨가 결국 패해 우두머리 [[막머우헙|막무흡]]이 처형당하고 멸망 위기에 몰리자 만력제는 이 상황에 개입하여 막씨 일족에게 고평 땅에 막무흡의 4촌 [[막낀꿍|막경공]]을 봉해 그들을 보호하였다. *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3남 복왕 [[주상순]]은 [[명나라]] 말기에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자 [[이자성]] 군대가 [[식인|투실투실 살이 찐 그를 붙잡아 연회를 열고 사슴고기와 섞어 술안주로 삶아 먹었다.]] 살해당한 복왕의 몸에서 나온 기름도 술에 섞어 마셨다고 한다. '[[사슴]] 록(鹿)'과 '복 록(祿)' 자가 발음이 같은 걸 노린 [[언어유희]]로 '이놈이 누리던 복록을 우리가 누리자'란 생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한다.[* 사실 복왕 [[주상순]]은 탐학질이 심했기에 [[이자성]]이 그를 생포해서 백성들 앞에서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라고 묻자 백성들이 하나같이 씹어먹을 기세로 '죽이라.'는 말만 했다. 주상순이 끔살되자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탐학질이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만력제의 유골이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타버려서 완벽한 연구는 못하지만 발견 당시 상체가 눈에 띄게 심하게 구부러져 있는 등 심각한 육체적 질환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었기에 사실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통치를 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즉 각종 질환이 심각한 수준이라서 애초부터 나라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다. * 복왕의 아들 [[주유숭]]이 [[명나라]] 멸망 후 [[남명]] 정권의 초대 황제인 홍광제가 되면서 복왕도 황제로 추존되었다. 결국 만력제가 은근히 바라던 대로 사랑하던 아들이 황제가 됐으니 소원 성취는 했는데 문제는 나라가 무너지고 북경이 황폐화되고 홍광제도 무능하여 겨우 1년 만에 청군에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 만력제의 재위 기간은 조선 [[선조(조선)|선조]](재위 1567-1608)와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재위 기간과 겹친다. * 1616년 [[중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남경교안]]이 일어났다. 흔히 교안(敎案) 하면 [[청나라]] 말기 서구 세력의 유입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기에 시작한 것이다. 생각보다 꽤 이른 시기임에도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아닌데 이미 당나라 시대의 [[불교]] 박해 때 [[경교]]([[네스토리우스파]])가 꼽사리 끼어 박해당했기 때문이다. * [[관우]] 신앙을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1614년 관우를 신격화하는 삼계복마대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이라고 했고, 이후 [[청나라]] [[순치제]]는 이 어려운 시호를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라고 간단화했다. * 만력제가 즉위하던 해에 [[초신성|엄청나게 밝은 객성]]이 나타났는데 이 일은 장거정과 어린 만력제 사이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물론 이 객성이 실은 동반성의 물질을 흡수한 백색왜성이 일으킨 초신성 폭발이었다는 사실을 현대 천문학자들이 알아냈지만, 16세기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으니...] 전통적으로 객성은 하늘이 천자에게 내리는 경고로 여겨졌는데 만력제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영 불편했던 것. *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를 보면 조선 사신들이 즉위한 만력제를 보고 와서 선조에게 "황제가 11살밖에 안 됐는데 모후가 수렴청정도 안 하고 혼자 다 정치할 정도로 똑똑하더라고요."이라고 말했다. 이걸 들은 조선 관료들은 "전하, 삼대(하은주 시절) 이래로 11살인 천자가 스스로 그렇게 정치를 잘한 적이 없습니다. 저건 거짓말이니 믿지 마세요."라고 반박해 갑론을박이 일어났다. * 청나라의 [[강희제]]도 을병대기근 당시 조선이 도움을 요청하자 쌀을 보내줬다. 조선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쌀을 보내줬다는 점에서 만력제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라면 명나라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과 곡식을 보내준 탓에 조선에서만은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줬는데 비해 강희제는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일 뿐만 아니라 대기근 당시 고통받던 조선에게 쌀을 보내줬음에도 조선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희제의 할아버지인 숭덕제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엄청나게 수탈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악연이 손자 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듯하다. 다만 강희제를 높게 평가한 조선인이 없지는 않았는데 [[정조(조선)|정조]]의 경우 "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5/2020050500047.html?outputType=amp|여담으로 해당 구휼미의 경우 청나라 기록에서는 옥처럼 흰 쌀로 구제하였다고 나오고 조선 쪽 기록에서는 먹을 수도 없는 썩은 쌀이었다고 나오는데 강희제 성격상 먹을 수도 없는 썩은 쌀을 구휼미로 줄 리는 없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 쪽 기록이 거짓으로 보인다.]]] * 임진왜란 때 병력 및 쌀을 보내줬다고 국내 인터넷상에서는 "중국 입장에서나 암군이지 조선 입장에서는 고마운 황제"라는 옹호론도 있으나 왜란 이후 조선에 무리한 은 지출을 요구[*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knightblack&logNo=10013120211&referrerCode=0&searchKeyword=%EA%B4%91%EC%84%B8|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무리한 은 지출을 요구한 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 각지의 은을 긁어모으던 광세의 폐단이 조선에도 불똥이 튄 것이고 그 원흉이 만력제이니 설령 본인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한 것을 보면 조선 입장에서 마냥 고마운 인물도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