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력제 (문단 편집) == 무덤 == 만력제의 묘인 정릉(定陵)[* 명 13릉에 가면 흔히 지하 궁전이라는 곳을 가는데, 그 지하 궁전이 바로 정릉이다.]은 만력 12년이던 1584년 11월부터 만력 18년이던 1590년 6월까지 상술했듯 명나라의 2년치 국가예산이던 은 800만 냥을 들여 건설되었고, 이후 30년간 비어 있다가 만력제가 죽은 후인 1620년 10월 3일에 만력제의 시신이 안장되었다. 1955년 10월 4일에 국무원의 승인을 받고는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이[* 후일 그가 쓴 희곡이 바로 [[해서(명나라)#s-2|해서파관]]. 그리고 이 희곡은 [[해서파관 사건]]으로 비화되어 [[문화대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우한도 체포되어 옥사한다.]의 주도로 1956년 5월에 발굴을 시작한 후 1958년 7월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1959년 10월 1일에는 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한 '정릉 박물관'이 개관되었고 발굴 이후 [[저우언라이]], [[천이]], [[쑹칭링]] 등 중국의 고위 정치가와 [[호찌민]] 등 세계의 명사들이 두루 관람하였고 천이는 유물 보전을 위해 6만 원을 따로 기부하는 등 상당한 업적으로 선전되었으나 저우언라이는 우한이 요청한 [[영락제]]의 장릉 발굴에 대해서 금지하는 등 추가 발굴 사업은 유보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들이닥치며 1966년 8월 24일에 만력제, 효정현황후 왕씨, 후비들(공각황귀비 정씨, 공순황귀비 이씨)의 유골은 봉건의 잔재로 규정되어 정릉 앞 광장에서 [[홍위병]]들에 의해 "봉건지주계급의 우두머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인민재판]]에 회부된 후 바위로 찍혀 부숴지고 불태워졌다. 이 과정에서 정릉 박물관에 있던 황제의 황후, 후비들의 초상화, 정릉에서 나온 일부 부장품들, 자료 사진들도 만력제의 시신과 같이 소각되었다. 원래 발굴 의도는 정말 만력제가 아파서 30년간 정사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때 그의 한쪽 다리가 짧다는 사실과 [[http://k.sina.com.cn/article_1653603955_628ffe7302000cbav.html|키가 164cm 정도였고]] [[아편]]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구체적인 질환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유골과 부장품이 모두 불타버렸기에 정확한 진상은 오늘날에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신뢰성 있고 자세한 기록이 발굴되지 않는 이상 진상은 영원히 미궁 속일 것이다. 거기에 만력제의 유골이 파괴된 날에 폭우가 쏟아져서 남아있던 재도 사라졌고 이 때문에 현재 만력제의 유골은 머리카락 몇 가닥 외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987948&cpage=29&mbsW=search&select=stt&opt=1&keyword=jpg|참고 자료]] 이에 대해 후대의 몇몇 중국인들은 '만력제가 생전에 벌인 악행들에 대한 천벌을 죽은 뒤에야 받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흑역사인 [[문화대혁명]]에 대해서조차 만력제 유골을 부순 것만큼은 잘한 일이라고 옹호하는 중국인도 있다.] 전술하듯 만력제 무덤 속 부장품 일부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파괴되었지만, 발굴이 제대로 진행되었어도 [[무령왕릉]]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심각한 훼손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정릉과 같은 대형 무덤을 발굴하여 조사할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능 안에 있던 유물들은 놀랍게도 거의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었지만, 명 황실의 [[비단]]은 탈수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으며 냉동실 하나 없어서 발굴 직후에 많은 유물들이 복원 불가능한 상태로 훼손되고 말았다. 여기에 결정적인 이유는 발굴에 참여한 연구원들이 반동으로 몰려서 대부분 하방당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발굴대원 조기창은 발굴 보고서 작성 중인 1959년에 농장으로 하방되어 10년이나 중노동을 해야 했는데 이유는 '독가스를 살포한 죄'였다. 사실 그 독가스란 유물의 부식을 막기 위한 [[포르말린]]이었지만, 포르말린의 독한 향에 불쾌해진 공산당원들에겐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덕분에 정릉은 발굴보고서가 2022년 현재까지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발굴하지 않았다면 땅에 묻힌 채 후대를 기약할 수 있었을 천금 같은 유물과 학술자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이 당시의 트라우마로 중국 고고학계는 황릉 발굴을 금기시하게 되어서 중국 서안 일대에는 수많은 황릉이 발굴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소위 [[환빠]]라고 불리는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이 [[서안 피라미드 고조선 문명설#s-3|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