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력제 (문단 편집) == 평가 == [[명 4대 암군]] 중에서도 단연 원톱으로 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제신|은 주왕]], [[유왕|주 유왕]], [[이세황제]], [[영제(후한)|한 영제]], [[유의부]], [[유자업]], [[후폐제(유송)|유욱]], [[소소업]], [[소보권]], [[양제(수)|수 양제]], [[의종(당)|당 의종]], [[휘종(송)|송 휘종]], [[금나라|금]] [[해릉왕]]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군주를 꼽을 때 반드시 후보로 언급되는 군주이기도 하다.[* [[청나라]] 때 쓰인 정통사서 [[명사(역사책)|명사]]에서조차 [[명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사에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라고 했을 정도.] 한마디로 [[군주]] 한 명이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는가를 몸소 보여준 장본인으로 잘 알려졌다. 만력제는 [[암군]]들 중에도 '''특이한 축'''에 든다. 보통 암군으로 꼽히는 이들은 폭정을 저지르고 [[가렴주구]]를 일삼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무리수를 두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잘못된 정책을 펼쳤다.[* 전자에 속하는 사례로는 중국의 주왕, [[이세황제]], [[수양제]]와 [[해릉양왕]], 고려의 [[충혜왕]], 조선의 [[연산군]] 등이 꼽힐 수 있고 후자에는 [[로마 제국]]의 [[네로]]나 [[도미티아누스]], [[조선]]의 [[광해군]]과 [[인조]] 등이 속한다.] 이런 일반적인 암군들은 어찌되었건 무언가 일을 하다가 그게 잘 안 풀려서 나라를 망쳤는데, 만력제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나라를 망쳤다. 그런 점에서 암군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황제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 황제들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어 48년에 달했는데, '''30년 동안''' 황제 업무를 거부하는 사상 초유의 일을 벌였다.[* 재위 기간 2위는 바로 [[가정제]] 주후총. 무능한 황제 2명이 명나라 276년 역사 중에서 1/3인 93년 271일을 해먹었다. 반대로 말하면 명 태조 [[주원장]]이나 [[영락제]] 등 명나라 건국 초기의 황제들이 정치체계를 얼마나 잘 짜놓았는지 알 수 있다. [[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누스 대제|황]][[메흐메트 2세|제]]를 잘 세운 덕분에 [[군인 황제 시대|막장인]] [[앙카라 전투|사태]]를 수습하고 제국의 명맥을 이어갔다면 명나라는 개국 전반기에 국가체계를 너무나도 잘 만들어놔서 대놓고 막장인 황제를 끼고도 100년을 버텨낼 수 있었던 셈.] 만력제가 업무를 거부한 이유가 단순히 게을러서거나 꾀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정신질환이나 정치에 대한 환멸이 원인이라는 추측도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에 의해 만력제의 유골이 불타버려 현대적인 연구는 불가능하지만, 과거의 연구와 기존의 자료들을 검토하면 만력제는 몸의 윗부분이 눈에 띄게 곱추였고 왼쪽 발이 약간 짧은 기형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30년 동안 업무 거부를 하며 타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이러한 기형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게다가 재위 초반 10년은 [[장거정]]의 섭정 기간이기도 했으니,[* 다만 즉위 당시에는 10세에 불과하여 친정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실상 [[임진왜란]] 7년 동안만 일한 셈.[* 참고로 중국황제들중에서 조선에서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 황제들은 많았는데 일성록(日省錄) 1781년 4월18일 기사에 의하면 만력제보다 약 200년 이후의 중국 황제인 [[청나라]] [[건륭제]]도 조선 사신들한테 융숭한 대접을 해주어 청나라 민간에서 고려 황제라고 불렸다[[https://cafe.daum.net/historywar/Nwp/3235|#]]]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의 [[조선]] 출병에 적극적이었다.[* 근데 어차피 명나라 입장에서 지리적으로 조선이 일본과 명의 완충지대라 조선에 병력을 파병함이 이익이므로 굳이 만력제가 아니라 다른 유능한 황제였어도 명나라는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덕에 [[중국]]에서도 명나라가 망한 후 안 올리던 [[만동묘|제삿상]]을 [[대한민국|한국]]에서, 그것도 사후 300여 년 뒤인 [[20세기]] 초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 틈에 [[누르하치]]는 성장했고, 이것이 [[사르후 전투]] 및 [[정묘호란]], [[병자호란]] 심지어는 명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비록 조선이 '[[재조지은]]'이라고 [[만동묘]]를 지으며 제사 지내주긴 했으나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조선 조정 역시 만력제가 암군인 줄은 인지하고[* 당장 청나라에서 명나라는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와 천계제 때 망했다고 악평하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오는데 어디까지나 청나라에서 그렇게 말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조선인들이 이를 긍정하는 기록은 없지만 딱히 부정하는 기록도 없는 걸로 보아 조선인들도 어느 정도는 이에 동조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타국인 조선에서조차 청나라가 만력제를 악평했음이 알려질 만큼, 만력제가 중국에서 얼마나 평가가 나쁜지 보여주는 예시이다. "지난 해에 황제가 칙지를 내리기를 짐이 탕산(湯山)에 행차하여 명나라의 여러 능(陵)에 제사를 지냈는데, 여러 능들이 많이 무너진 것을 보고 개탄하였다. 명나라 중엽 이후로 국사가 폐이(廢弛)하였고, 말년에는 유구(流寇)가 소요를 일으켜도 지킬 사람이 없어서 무너지게 되었다. 지금 국가가 하나로 통일이 된 지 이미 1백여 년이 되었으니, 전 왕조의 능침(陵寢)을 수리해야 하겠다. 명나라 세종(世宗)에 대해서는 일찍이 윤전가(尹銓嘉)의 아룀으로 인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으나 다만 명나라가 숭정(崇禎) 때 망하지 않고 만력(萬曆) 과 천계(天啓) 때에 망하였기 때문에 역대의 제왕 사당 안에는 그 위패(位牌)를 없앴지만 능침에는 그냥 제사를 지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천계제는 원망할 수 없으나 만력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점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기록이 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40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ra_10912017_002|현종 9년 12월 17일 신사 2번째 기사]]] [[이덕일]] 같은 사람은 [[서인]]을 비판하며 무모한 북벌론을 폈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서인과 대립하던 남인이 더 청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폈고, 이런 '숭명반청'정서는 19세기 초까지도 지속된다.[* 지금도 일부 사대부 집안의 후손들은 청의 연호 대신 명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쓰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남 거창의 동계 정온 집안.] 당장 위의 발언을 한 사람부터가 다름아닌 [[송준길]]로, 이덕일이 극도로 증오하던 [[송시열]]의 육촌 겸 당여로서 현종 대 서인 산당(山黨)의 영수였던 인물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눈 건 송준길 사후 숙종 초([[경신환국]])부터였으며, 노론의 영수로 모신 사람이 송시열이다.] 결국 [[만동묘]]를 지어서 제사까지 지내준 시대에도 정사를 돌보지 않은 만력제의 잘못은 비판했을 정도라는 것. 결국 이러한 업무 방치는 곧 '''명의 멸망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분명 그는 능력이 있었지만 결국 스스로가 그 기회들을 버리고 홀로 평생 신하들의 말에 귀 닫고 놀고 먹는 길을 선택하며 살다 죽었기에 명청시대에 더욱 비판받게 되었다. 오죽했겠으면은,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인 강희제조차 '''제사를 받을 가치조차 없는 위인이자 황제'''라고 깠을 정도. 스승으로부터의 학대 때문이었는지 그나마 그는 아버지로서는 좋은 인물이었지만,[* 근데 사실 이마저도 어디까지나 3남 [[주상순]]한테나 그랬다는 것이지 [[태창제]]한테는 전혀 아니었다.] 그가 자식들을 위해 더 사치를 부리다가 더 많은 세금을 걷었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단 점에서 '''결국은 암군이라는 건 다를 게 없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운건 어디까지나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같은 걸로 봐야하며, 오히려 후일 [[사르후 전투]] 등, 청의 흥기에 도움을 주어 조선에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게 한 간접적 원흉으로서 공1 과9 정도의 암군이라고 판단하면 정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