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미아누스 (문단 편집) === 아들의 반란에 가담하다([[사두정의 내전]]) === 306년 7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병사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7월 25일 군대의 추대를 받고 서방 정제를 칭했다. 이에 동방의 정제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부제 취임을 승인해줄 테니 정제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자신의 재위가 합법화되길 희망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갈레리우스는 서방의 정제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지명했다. 그러자 [[막센티우스]]는 분노했다. 그는 20여 년간 제국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긴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었고 갈레리우스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그는 적어도 부제에 오르기를 희망했는데, 아버지의 부하였던 자의 아들이 단숨에 부제가 되고 자신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에 주둔한 근위대와 시민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켜 세베루스 황제에게 충성하려는 로마 시장과 몇몇 고위 행정관들을 살해했다. 그 후 그는 306년 10월 28일 황제에 즉위했고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로마의 자유와 위엄을 수호해줄 보호자로 지명되었다. 이때 막시미아누스는 아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로마로 달려와 황제의 의복을 입고 원로원으로부터 "2번째 아우구스투스"로 지명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세베루스 황제는 로마로 침공했으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추고 전쟁 경험이 풍부한 막시미아누스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세베루스는 라벤나로 도주했지만 라벤나 시민들에 의해 막시미아누스에게 넘겨졌다. 막시미아누스는 포로가 된 세베루스를 로마로 데려가서 자의를 벗는 조건으로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곧 뒤집혔고, 세베루스는 스스로 혈관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307년 말, 갈레리우스는 반란을 일으킨 막센티우스를 토벌하러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으나 결국 승리하지 못하고 본진으로 귀환했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수비를 강화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협상하기 위해 갈리아로 갔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의논한 후 자신의 어린 딸 파우스타를 콘스탄티누스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 대가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시미아누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이탈리아에서의 막센티우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트리어에서 파우스타와 결혼식을 올린 후 아우구스투스를 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