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북전투 (문단 편집) == 한무제 등극 == >"오늘 우리가 흉노를 토벌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후손들도 끝없이 해를 입을 것입니다. 전쟁 준비를 미리 하지 않으면 백성을 적에게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 염철론 中'''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2021103810a010a011.jpg|width=170]] || || '''[[한무제]](漢武帝)''' || [[문제]], [[경제]]의 [[문경지치]]를 보낸 후 즉위한 [[전한]]의 [[한무제]]는 야심만만한 황제로서 [[흉노]]에게 그동안 밀리던 형세를 뒤바꾸기 위하여, 과거에는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대규모 원정을 계획, 실시하게 된다. 이리하여 기원전 133년, 한나라는 무려 '''3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동원해 흉노의 [[군신선우]]를 유인하려는 계획을 실시한다. 비록 이 계획은 작전이 누설되면서 실패로 끝났지만 한나라가 더 이상 흉노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보여주게 되었다. 이후 4년 뒤,[* [[한서]]에서는 원광 6년(기원전 129년). [[사기]]에서는 원광 5년(기원전 130년)으로 기록됐다.] 한나라는 다시금 공격에 나선다. 이때 공격에 참여한 지휘관들은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 등이었다. BC123년 [[위청]]은 한무제의 조서를 받고 곽거병을 표요교위(剽姚校尉)[* 한서에 주석을 단 안사고의 해석에 따르면 표요는 굳세고 날랜 모습이라고 한다.]에 삼고 [[흉노]] [[공격]]에 동행을 시켰다. 여기까지만 보면 한무제가 아끼는 처조카에게 적당히 공을 세울 기회를 준 느낌이 든다. 이때의 전투에서 곽거병은 기병 800여 명을 거느리고 '''본대를 떠나 수백 리를 진격'''하였다. 보통은 이렇게 행동하면 상대에게 각개격파되거나 포위당하지만, 곽거병은 오히려 2천여 명 이상의 [[흉노]]를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흉노 선우의 할아버지뻘 되는 자약후(藉若侯) 산을 죽이고 선우의 막내 숙부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는 공을 세운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가 '''18살,''' 처음 출정 때의 일이다. 이 공격이 곽거병 본인의 폭주인지, 총사령관인 위청의 지시인지는 불분명하다. [[사기]]의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이나 [[한서]]의 위청곽거병전(衛靑霍去病傳) 모두 그저 곽거병이 대군에서 벗어나 수백 리를 진군해서 적을 물리쳤다고만 나와 있다. 일단 그 후 곽거병의 행적을 보면 이런 식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기도 했고, 위청이 보통 장수도 아닌데, 이렇게 위험부담이 큰 작전을 18살 애송이에게 맡겼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게다가 위청은 간신배는 결코 아니지만 윗사람 눈치는 많이 살피는 사람이었다.[* 위청은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출신은 미천한 편이었다.] 위청이 무제가 아끼는 처조카를 사지로 보냈을까? 여하간 이 싸움의 공이 전해지자 무제는 기다렸다는듯이 곽거병을 관군후(冠軍侯)에 삼았고, '''군에서 으뜸'''의 공이라고 치켜세워주며 1,600호를 내려주었다. 반면에 위청은 공이 적다 해서 별 상을 못 받았는데, 위청의 안타까운 사연은 계속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