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부육군 (문단 편집) == 게이오 군제개혁(慶応の軍制改革) == [[파일:attachment/막부육군/c7.jpg|width=600]] (게이오 원년(1864) [[오사카성]] 안에서 연습(演習)중인 막부 육군) 따라서 제2차 초슈정벌의 패전후, 게이오 2년(1866년) 8월 이후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아래에서 다시 대규모의 군제개혁이 행해졌다. 막부 행정체제를 서구식으로 개편하여 총재직이 신설되면서 육군국이 설치되고, 종래의 육군조직 위에 위치하는 형태로 옛 로쥬(老中)와 동격의 육군총재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막부직속의 군사조직의 일원화가 추진되어, 대번(大番) 등의 구식조직은 해체되거나 축소되고, 그 중 남아도는 인력에서 우수한 자를 장군친위대인 오힐총대나 유격대(오힐총대의 후신) 등으로써 육군으로 편입시켰다. 강무소도 육군에 편입되어, 연구기관인 육군소로 개칭되었다. 이미 일정한 서양화가 진행되고 있던 하치오지센닌도신(八王子千人同心)[* 구 [[타케다]] 가문의 가신들을 중심으로 근방의 지주와 부농으로 편성된 부대. 코슈(甲州)가도의 거점인 하치오지(八王子)에 주둔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10개조로 구성되어있으며 1개조는 100명으로, 각 조마다 센닌도신구미가시라(千人同心組頭)가 있으며, 이들을 하타모토와 동격의 하치오지센닌가시라(八王子千人頭)가 통솔한다. 원래는 코슈 국경지방의 수비를 맡았으나 코슈가 직할지로 편입되어 국경수비의 의미가 퇴색된 후로는 조마다 교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닛코 동조궁]] 경비에 임했다. 종래에는 반농반무사의 특이한 신분이기는 하되 무사로써 대접받고 있었다는 설이 많았지만, 최근의 연구로는 공식석상에 참여할 때를 제외하면 장검을 패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정식 무사계급은 아니고 무가봉공인에 해당하는 대접을 받았다는 추측이 있다.]이 편입되어, 하치오지센닌다이(八王子千人隊)로 개칭된다. 조직의 확대에 맞추어, 육군봉행의 와카토시요리[* 若年寄格. 로쥬(老中)다음의 직위로써 하타모토(旗本)의 통솔을 맡고 있었다.]로의 승격, 보병봉행이나 살병봉행직의 설치 등 지휘계통도 정비되었다. 축조병(築造兵)이라 불린 공병대, 천령의 부민(天領の農民)[* 에도 막부가 직할로 경영하는 영지의 농민들을 말한다.]으로 조직한 어료병(御料兵:치중보급대)도 편성되었다. 또 샤를 샤노와 대위를 비롯한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여 장비부터 편제까지 완전 프랑스식으로 훈련받는 전습대(伝習隊)가 신규편성되었다. 병력조달의 방법도 개정되어, 병부령으로 충원하는 보병대 외에, 하타모토의 녹봉 수준에 따라서 소총대를 보유시키고, 여러 가문 분량을 합쳐서 소대나 대대급의 소총대를 편성하는 조합총대(組合銃隊) 제도도 이행되었다. 조합총대용의 병력은 보병대와는 달라서 평시에는 각 하타모토의 저택에서 대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66년 1월에 병부령에 대해서는 금액을 막부에 헌납하고 그 대금으로 막부가 병력을 직접 운용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처럼 재차 출진이 이루어진 1867년 9월 첫 단계에서 합계 48개 대대, 총원 24000명의 징집을 실현하게 되었다. 다만 9월에 조합총대는 막부의 재정사정이나 소총병의 급여도 하타모토에 따라 제각각 다르고, 구성인원이 하타모토의 역대 가신, 영지 출신자, 직업소개소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섞이고, 부대의 통일성을 기하기 어려운 점도 있어 조합총대 제도는 폐지된다. 최후시점에서 막부육군은 보병대 8개연대(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하리마령에서는 제16연대가 편성되어서, 총 9개연대라고도 한다)와 전습대 4개대대를 중핵으로, 일본최대의 서양식 군대가 되어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