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부육군 (문단 편집) == 발흥 == [[파일:external/pds.exblog.jp/e0040579_19123100.jpg|width=1000]]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黒船来航)]] 이래로 전통적인 일본군의 제도와 장비로는 서구 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더군다나 서양 세력은 전통적인 아시아적 관념상 강대국에 속했던 청나라를 [[아편전쟁]]으로 몰락시켰다. 이에 크게 동요한 막부는 군사 제도의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1822년 [[네덜란드군]] 교범을 입수하여 연구, 타카시마류 포술을 창안한 타카시마 류한(高島秋帆)이나 에가와 에이류(江川英龍)와 같은 포술 사범들을 초빙하여 근대 전술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흑선내항이 발생한 1854년에는 로쥬(老中: 막부의 관직)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의 주도로 군제 개혁안이 세워졌다. 그 일차로 [[하타모토]](旗本)[* [[쇼군]] 직속 가신으로 [[고쿠다카]](석고, 石高)가 1만석 이하이며(1만석 이상이 [[다이묘]]), 쇼군이 거행하는 의식에 참석하여 쇼군을 알현할수 있는 자격을 지닌 무사계급.]나 고케닌(御家人)[* 고쿠다카는 하타모토처럼 1만석 이하지만 쇼군의 행사에 참석하여 알현할 자격은 얻지 못한 가신들.]의 자제들에게 서구식 전법을 교육시키기 위해 강무소(講武所)가 1856년 4월에 설치되었다. 강무소에서는 전통적인 검술뿐만 아니라 서양 총포술과 전술을 가르쳤으며, 나중에 오쿠즈메(奥詰)라 불리는 장군의 호위병력도 양성되었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가 정권을 잡으면서 서양식 군사제도의 도입은 중단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