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한 (문단 편집) === 사회 === 마한 전체를 통솔하는 진왕(辰王)을 제외하면 지도자는 있지만 각 소국을 다스리는 수준의 힘만을 가진 듯 보인다. 지도자를 [[신지#s-1.2]](臣智), 그 다음 관직을 읍차(邑借)라 했고 나머지 관직들로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었다. 진왕이 있던 [[목지국]] 말고도 [[신분활국]]과 [[신운신국]]의 지도자는 각각 이아불예(離兒不例)와 견지보(遣支報)라는 특별 우대 호칭이 있었다고 언급되므로, 이 두 소국이 마한 내에서 세력이 컸던 것으로 파악된다. 《[[삼국지(정사)|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비록 여러 나라의 도읍에 우두머리가 있지만 읍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는 기록도 남아있어 제정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소도]](蘇塗)라는 것을 세우는데 이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기는 곳을 뜻하며, 이곳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잡지 못하게 되어 마한 사람들이 도둑질을 즐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제정분리 사회 양상은 [[고조선]] 초기의 제정일치 사회와 대비된다. 인구수는 큰 나라는 1만여 호(戶),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라고 하는데 이는 마한 뿐 아니라 [[진한]]과 [[변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가까운 북쪽 나라들은 예의를 비교적 알았으나 남쪽에는 그렇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지역은 마치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곳과 같았다고 한다. 다만 《삼국지》는 중국의 관점에서 작성되었으므로 이 서술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해석하자면 마한 소국들이 거리별로 중국에 대한 관심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나타내는 서술에 가깝다.[* 당장 중국 [[명나라]]에서 자신들과 지리상으로 가까웠던 [[조선]]과 멀었던 [[일본]]을 각기 어떻게 평가했는지 생각해보자.] 농사의 경우 5월에 씨를 뿌려 10월에 수확한다는 기록이 나타나며, 농경 이외에도 [[누에]]치기를 하며 [[뽕나무]]를 가꾸고 길쌈하여 베를 짜기도 했다. 마한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는 크기가 [[배(과일)|배]]만큼 큰 밤과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닭이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