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취 (문단 편집) == 역사 == || [youtube(x-nhDPLuMnM)] || || [[닥터프렌즈]]가 다룬 마취의 역사 ||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은 증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왔고, 그중에는 당연히 환부를 도려내거나 꿰매는 등 상당한 [[통증]]을 유발하는 치료법이 존재하기 마련이므로, 그 과정에서 통증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마취법이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또한, [[환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수술]]을 망칠 수도 있고, 고통이 심한 경우에는 [[쇼크]]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마취는 필수적이다. [[화타]]가 마비산을 이용해서 [[마취]]를 했다고 전해지며, 급한대로 독한 [[술]]을 이용해서 재우거나 고통 경감을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하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절에 [[전장]]에서 [[절단]][[수술]]을 할 때는 독한 [[술]]을 먹이고는, 머스켓 총알을 입에 물리고 했다고 한다. '고통을 참고 견디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숙어인 'bite the bullet'(총알을 물다)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마취]]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아편, 맨드레이크, 대마, 홉 등 다양한 약재들을 사용했으며 [[동아시아]]권에서는 버드나무, 아편과 대마를 주로 활용하고 침술도 썼다. [[치과]]에서도 [[치아]]를 뽑을 때 엄청나게 아팠는데 [[19세기]]까지 [[서구권]]에선 그냥 이를 '''[[집게]]'''로 뽑았다. 이것도 그나마 양반인 게, 더 전에는 [[전문가]]나 [[의사]]가 뽑은 게 아니라 [[대장장이]]를 불러서 쇠 잡는 [[집게]]로 뽑았다고 한다. 덕분에 이 뽑는 날이면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구경했다는 흠좀무한 기록도 있다. 1842년 미국의 의사 크로포드 롱은 [[에테르]]를 마신 사람이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내색을 안 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에테르를 이용한 무통수술을 시도해보게 되었다. 크로포드 롱은 환자에게 에테르를 적신 수건을 대서 마취를 시킨 후 목에 있는 혹을 잘라냈는데, 환자는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최초의 무통 외과 수술) 이후로도 여러차례 무통 수술을 했지만 세상에 알리지는 않았다. 한편 1844년 미국의 치과의사 웰스는 웃음 가스 파티에 갔다가 본인이 다리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아프지 않은 것에 착안해 본인이 직접 가스를 마시고 동료에게 이를 뽑게 했다.(최초의 무통 발치 시술) 웰스는 이후 15명에게 같은 방법을 무통 발치를 성공하였고, 후배 치과의사이자 하버드 의사들과 인맥이 두터웠던 모튼에게 효과를 검증해줄 권위있는 외과의사를 소개해달라고 한다. 이에 모튼은 외과과장 워렌을 소개시켜주고, 1845년 공개시연을 하였으나, 마취제의 양이 부족해 환자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한편, 이 시연을 지켜본 모튼은 마취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화학자 잭슨으로부터 에테르에도 마취효과가 있음을 전해 듣고, 마취제로 에테르를 사용하기로 한다. 1846년 10월, 모튼이 직접 에테르를 이용해 마취시연을 했고, 외과과장 워렌은 환자의 턱에 있던 종양을 잘라내는데 성공한다. 이는 학회지에 실렸고 곧 전세계로 퍼지게 되면서 같은 해 영국에서는 에테르를 이용한 다리 절단수술에도 성공하게 된다. 본격적인 마취제는 [[1847년]]에 영국에서 발명된 클로로포름이었다.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심슨(James Young Simpson, 1811~1870)이 [[에테르]]를 사용해서 최초로 무통분만을 시험했다. [[1847년]] 후반에 클로로포름이 마취 효과가 좋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출산]] 시 고통을 줄이기 위한 투사로 나섰다. [[1853년]], [[산부인과]] 의사보다는 공중보건 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현대에 널리 알려져 있는 [[존 스노우]]는 [[빅토리아 여왕]]이 [[레오폴드 조지 덩컨 앨버트|레오폴드 왕자]]를 분만할 때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여왕이 클로로포름 냄새를 맡게 함으로써 통증없이 분만을 유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 효과에 만족한 빅토리아 여왕은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라|베아트리스 공주]]를 낳을 때도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무통분만을 또 다시 시행하여 좋은 결과를 얻음으로써 클로로포름 마취법은 널리 확산되게 됐다. 제임스 심슨이 마취를 의학적 처치에 적용하려고 할 때,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던 바 있다.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지의 산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마취시술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제퍼슨[[의과대학]]에서 40년 동안 교수로 지낸 찰스 D.메이그스는 마취가 [[산모]]에게 끼칠 수 있는 부작용을 우려했다. 그는 [[아기]]가 산모의 몸에서 나오는 데 필요한 힘과 산모의 고통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여겼고, 마취의 영향으로 산모가 의식을 잃었을 때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실제로 [[현대]]에도 경막외 마취를 하면 산모가 힘을 줄 수 없어 [[분만]]이 길어질 수도 있다. [[전문의]]들의 지적은 그 나름의 근거를 갖추고 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계에서 '여성이 분만할 때 잉태의 고통을 받는 것은 [[야훼|하느님]]의 섭리'라는 이유 때문에 조직적으로 마취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문제를 철저히 연구한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A.D.Farr는 [[1980년]] Anaesthesia라는 저널에서 '''"교회가 조직적으로 마취를 반대했거나, 개개인들의 반대가 만연했었다는 점에 관해서도 뾰족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말했다. Farr는 연구를 거듭한 결과, 종교적 이유로 마취시술을 거부하는 환자들이 나올 것을 우려한 심슨이, 환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근거를 미리 마련해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편견이 널리 퍼진 이유는 [[19세기]] 과학과 종교의 대립관계로 역사를 관찰한 드레이퍼나 화이트 같은 학자들이 그들의 저서에서 출산 시 마취제의 사용이 성경적 근거와 불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억압되었다고 계속해서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을 우연히 접한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종교와 과학>에서 이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 오류를 범했고, 그 결과 오늘날 이런 편견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반대파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환자들 개개인이 종교적 이유로,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마취를 거부하는 일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중에는 비과학적인 미신에 근거해서 거부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가령 위에 언급한 [[산모]]의 [[출산]]에 대해 '마취를 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아기]]에게 [[모성애]]를 느끼지 못한다'란 식의 편견이 아직도 현대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지 기독교계 차원에서 주장한 것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