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초 (문단 편집) === 통솔 === 연의에서 마초는 조위 제장 중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허저와의 일기토에서 우세한 무승부를 거두고 만인지적 장비와도 호각을 이루는 것으로 것으로 묘사되는 맹장형 캐릭터이나 정작 진짜배기 장수로서의 정수인 전략과 용병술에 있어서는 한수나 방덕에 의존하고 때론 성급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일을 그르치는 등 최상급의 일신의 무력에 비해 다소 미흡한 구석이 있게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마초의 군사적 행적을 보면 마초는 일신의 용맹을 앞세우기보단 상당한 수준의 전략적 식견과 용병술에 의해서 군을 움직였고 상당히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곽원]]이나 [[하후연]] 같은 명장급 장수 상대로 이긴 전적도 있고 당대 최강의 조조의 군세를 상대로 국지적이나마 조조를 위기로 몰아넣는 등 상당히 선전하였다. 이러한 전적으로 봤을 때 마초의 군재는 충분히 뛰어났다. 다만 중과부적으로 조조의 군세에 연거푸 패하고 장로와 유비 휘하에선 별다른 공적을 세우진 못하였으니 군사적 커리어가 아주 우월하다고 볼 여지는 없다. 마초의 주요 군사적 커리어는 다음과 같다. * 어린시절부터 관중 호족과의 싸움에서 활동했고 20대 후반에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며 관서를 진동케 하고 맹위를 떨쳐 사례 지역 제장들과 관원들이 모두 진압[* 뛰어난 인재라고 볼 수 있는 [[가규]]도 이때 곽원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마초군에 의해 곽원군이 궤멸되자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하는데 실패한 고간 휘하의 하북의 명장 곽원을 쓰러뜨렸다. 이때 곽원이 이끄는 군세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견초전에서 고간이 진수한 병주의 총병력은 정예 5만으로 확인된다. 일시적이나마 사례지역을 발칵 뒤집어 엎은 곽원이 기세를 감안할 때 그가 이끄는 군세는 최소 2~3만 명으로 추정. 따라서 마초가 1만의 군대를 지휘해 자기 군세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은 많았을 곽원을 공격해 그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낸 것은 상당히 인상 깊은 군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곽원이 도하 중에 기습한 것이긴 하나 그것도 정확히 예측하고 군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니 마초의 용병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마초는 화살을 맞아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상투혼을 발휘해 종횡무진 군세를 이끌어 곽원군을 궤멸시키고 사례 방면을 안정시켰다.[* 연의에서는 듣보잡이지만 실제 역사상에선 한시적이나마 조조에게 유효타를 성공시키고, 세력균형과 판도를 완전히 반전시킬 뻔 했던 [[고간(삼국지)|고간]]과 그의 상장, 심배가 자세력 하북의 명장으로 인증한 [[곽원]]의 임팩트는 생각보다 크다. [[고간(삼국지)|고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간은 [[원담]], [[원상]]처럼 [[원소(삼국지)|원소]]의 직계 가족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원소의 유력 일족으로서 유표 휘하의 실세 [[채모]]처럼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잘 나갈 때도 별로 좋은 소리가 안나왔던 채모와는 달리 최소 한지역을 재패할 제후 수준의 뛰어난 명망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만약 고간의 봉기가 성공해 독자세력화가 이뤄졌거나 적어도 할거 노선이 어느 정도 지속됐다면 조조는 북방의 원상과 인접해 있으며 막 점령해 민심이 적대적이었던 기주 북부/유주 일대에 고립되어 북쪽의 원상과 오환, 서쪽 병주의 고간의 압박을 받는 형세가 되고 더불어 고간이 사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면 조조에 적대적이었던 유표와 고간 사이의 연대와 소통이 원활해져 중원까지 공세를 받게 되는 등 조조 입장에선 최악의 구도가 확정된다. 이쯤 되면 조조는 그 동안 원상, 원담과 몇 년 동안 싸워가며 고생 끝에 먹었던 걸 도로 다 뱉어내야 함은 최소한이고 그 자신의 생명도 위태로운 지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설사 이 정도 파국까진 치닿지 않더라도 고간이 업성 전복이 아니라 최소한 호관 봉쇄와 사예 장악까지만 성공했더라도 조조에겐 역시 치명타였다.] * 30대 중반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전투력은 강하지만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정치력의 결여로 조금만 수틀려도 와해되기 십상인 중구난방 서북의 군벌들을 규합하여 구심점이 되어 군벌 연합체를 이끌었다. 이때 마초는 분명 명성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딱히 두드러진 위상을 갖춘 게 아닌 여러 갈래의 서북방 군벌 가운데 한명에 불과했고 이 시점에 서북방 군벌 가운데 가장 알려진 인물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분명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중앙권력과 드잡이질을 벌여 명성(혹은 악명)을 쌓은 [[한수(삼국지)|한수]]였다. 연령에 있어서도 한수는 이때 이미 환갑을 넘긴 관록 있는 인물인데 지금도 유교 문화권에선 리더 선출에 있어서 나이가 작용하는 여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감안하면 당대에 마초가 한수를 제치고 서북방 군벌 연합체의 우두머리가 된 건 꽤 파격[* 비슷한 시기에 30대의 나이에 구장들을 제치고 한 국가를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에 오른 주유나 육손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비교적 확고한 권위를 갖춘 세력의 군주의 권력을 위임받은 입장이라 약간의 잡음은 있을지언정 얼마든지 내부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지만 마초는 거의 동등하거나 위상과 권력이 더 높았다면 높았을 군벌들 틈바구니에서 리더로 선출된 격이니 더 파격적이다. 어찌 보면 반동탁 연합군의 수장으로 선출된 원소의 마이너 버전이다.]적이다. 이러한 불리한 정치적 입지를 뛰어넘어 서북방을 대표하는 군웅으로 선출된 걸 보면 마초의 군사적 재능과 리더십이 꽤 뛰어났음을 짐작[* 물론 [[한수(삼국지)|한수]] 항목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이 양반은 기본적으로 뭔가 일을 꾸밀 때 항상 얼굴마담을 앞세우고 자기는 배후에서 실세로 군림하는 음흉한 스타일이라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당시 관서에 난립한 군벌 가운데 아마 가장 젊었을 마초가 대표가 된 것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할 수 있다. 호삼성은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 배후를 노리고 도하하는 서황과 주령을 보고 마초는 군사를 몰아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한수는 선봉군은 그냥 통과시키고 조조 본대가 도하할 때 일격을 가하자는 일종의 유인책[* 혹자는 이 대목에서 당시 관중연합군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때 마초의 주장은 후에 전해 들은 조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조조군에게 큰 위협을 줄 수 있는 전술적 선택이었는데 한수의 발언권이 더 큰 걸 보면 실질적인 오너는 마초가 아니라 한수라는 얘기. 물론 한수의 유인책 역시 꽤 일리가 있었고 실제로 조조는 한수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거의 죽을 뻔 했다. 실제로 습격으로 엄청난 성과를 낸게 마초였고 결과적으로 무산돼서 문제였지…]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상황을 옳게 본것은 마초였고 관중 연합군은 서황과 주령에게 배후를 털리고 조조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내주는 빌미를 제공하는 오판이 되었다. 조조는 마초의 전략적 통찰을 후에 전해 듣고 "마초 그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 조조는 선봉군이 무탈하게 도하하는 걸 보고 방심한 상태에서 도하하다 마초군의 기습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조조가 탄 배의 사공이 화살에 맞아 죽을 정도였으니 그 긴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허저의 불굴의 호위 덕분에 다행히 살 수 있었다. * 가후의 이간책에 속아 넘어가고 조조와의 연이은 야전에서 계속 패배했다. * 마초와의 전쟁을 통해 조조군 전사자가 만 단위였다는 기록도 있다. 10만 명 중 1만 명만 날아가도 전멸 운운했던 시대상을 감안할 때 마초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긴 했어도 조조군의 피해 역시 만만찮았다는 방증이다. * 조조에게 대패했으나 겨우 1만 남짓한 군세로 농서 일대에서 재기에 성공했으며 적어도 자신보단 많은 병력을 거느렸을 당대의 유력한 야전 사령관 하후연을 야전에서 패퇴[* 마초와의 전투에서 패배해서가 아니라 하후연의 본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군을 물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상 하후연은 마초에게 패배한 게 맞다. 당시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하후연이 구원하기 전에 포위해서 격파하고 하후연과 맞붙는다. 마초는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요격와서 하후연은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마침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하후연은 마초의 기세에 '''먼저 밀리고''' 마침 모반이 일어나서 이걸 기회로 퇴각한 것에 가깝다. 참고로 이때 마초가 이끈 병력은 1만 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 추정된다. 마초가 농서에서 재기해 양부를 중심으로 하는 기성을 공격할 때 이끈 병력은 본인 휘하의 패잔병을 포함해서 이민족, 한중의 장로 등으로부터 빡빡 긁어모아 고작 1만 명 수준이었고 기성에서의 저항도 만만찮았으니 전사자도 꽤 있었을 것이다. 농서 일대를 확보하고 어느 정도 증원됐다 하더라도 아마 1만 명 언저리 수준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시켰다. * 농서 일대를 일부 확보하고 재기를 노렸지만 억지로 항복시켰던 양부와 조앙 등을 중심으로 내부문제[* 이 부분은 마초가 기성을 점령할 때 명망있던 친 조조라인 지방관 양주별가 염온과 양주자사 위강을 죽이는 등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가 인심을 잃은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염온은 그가 포섭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케이스이고 애초에 극강의 친조조 라인이었고 마초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양부 같은 경우는 마초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와 무관하게 배신했을 확률이 높지만...]가 불거지고 1차전에서 패배를 만회하고자 장합을 앞세운 하후연에게 끝내 패해 근거지 양주를 영영 상실한다. 사실 이때 장합이랑 진짜로 맞붙은 건 아니고 내부의 배신으로 재봉기 근거지인 농서를 잃고 방랑군으로 전락하다시피 하다 저왕 [[천만]]에게 붙어 구사일생으로 겨우 호흡기 유지하던 중 장합이 기병 5천을 이끌고 진창을 통과해 위수까지 육박[* 이때 마초를 농서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장합의 공이라기보다는 하후연의 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다른 제장들은 조조의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일단은 마초의 움직임을 지켜보자는 입장이었지만 하후연은 마초에게 빈틈을 허용하면 필시 다시 농서를 회복할 것이라고 보고 바로 장합을 파견해 마초를 몰아낸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무슨 대단한 전략적 식견이라기보다는 재고 따지는 것 없는 하후연 특유의 호전성으로 볼 여지가 다분하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으니... 사실 마초와의 1차전에서 하후연이 기성에서 포위당한 위강을 제때 구원하지 못한 건 조조의 재가를 받느라 시간을 허비한 탓이 컸기에, 2차전에선 똑같은 실책을 반복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군을 움직인 건 분명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후연의 판단은 춘추에 나오는 "장수는 국가에 이익을 줄 수 있을 경우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라는 구절의 좋은 예일 것이다. 뭐 나쁜 예는 [[등애#s-2.10|다들 알다시피... ]]]하자 불리하게 여겨 싸우지도 않고 한중으로 퇴각해버렸다. 어쨌든 마초의 패배는 패배다. * 장로[* 다만 한중의 장로 휘하에서 수차례 군사를 빌려 옹주 수복을 도모했다 실패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마초는 후에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의 결정적인 장애요소인 한중분지와 관서지역을 가르는 진령산맥의 험준함을 먼저 온몸으로 절감했을 것이다.]와 유비 밑에선 딱히 두드러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한중공방전]]을 마지막으로 군사적 커리어가 끊긴다. * 단 이 부분은 마초가 일부 평자들의 추측처럼 건강 문제가 됐든 어쨌든 간에 분명 예전 군웅 시절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진 못한 건 맞는데, 한중공방전에서 어느 정도 군공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니 활약이 아예 없었다곤 단정할 순 없다. 또 마초가 무도/음평 공략에 실패했다고 해서 무작정 심신이 피폐해서 기량이 저하됐네 어쨌네 하는 것도 비약일 수밖에 없는 게, 무도/음평 공략은 마초 혼자만 투입된 게 아니라 이전 탕거전투에서 장합을 격퇴시키고 한창 기세등등하던 만인지적 [[장비]]까지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략에 실패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조홍과 조휴가 무도/음평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서 수비를 잘 했다고 보는 게 합당[* 실제로 무도/음평이 촉한의 영향권에 든건 이로부터 10년 후 [[진식]]과 그를 지원한 제갈량 본대가 [[곽회]]를 쫒아내고 난 이후이다.]할 듯 싶다. 어쨌든 [[조홍]]과 [[조휴]]에 막혀 무도/음평 공략에 실패한 후 유비는 전군을 동원해 한중에서 조조와 엄청난 난타전을 벌였는데, 한중공방전은 장비, 마초, 황충, 조운, 그리고 향후 북벌군의 주력 상장이 되는 위연, 왕평 등도 모두 참여했으며 책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법정, 황권 등 제갈량(후방 지원)과 관우(다른 요지 진수)를 제외한 '''촉한 최전성기의 최고의 인적자원들'''이 모두 투입된 전쟁이었기에 여기서 마초의 공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장마황에 비하면 약간 급이 떨어지는 조운도 이 싸움에서 현란한 무용과 기마술을 뽐내며 최선의 역할을 다했다는 걸 생각하면 마초 역시 최소 유비군 본대 소속으로 열심히 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가령 위연 같은 경우는 분명 한중 공방전에 종군했지만 무슨 활약을 보였다는 얘기조차 전혀 없는데 전쟁이 끝난 후 군공을 인정받아 한중 태수에 임명되었다. 그간 누적된 걸 감안한다 치더라도 정말로 한중 공방전에서 아무런 군공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인선이기에 위연은 유비군 본대 소속으로 많은 활약을 보여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초 역시 이와 비슷한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 * 마초의 커리어를 논할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하면 단연 [[방덕]]이다. 전장에서 늘상 적진에 돌격하여 적군을 격퇴하였으니, [[방덕]]은 [[마등]]군 내의 최고의 무용을 지녔으며, 마등이 입조한 후에도 마초를 따라 반란에도 가담하고, 기성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꾸준히 마초를 지탱했다. 유비에게 관우, 장비가 있었던 것 처럼 맹장 방덕의 존재는 분명 마초에게 있어서 군재를 발휘하게 해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장로 밑에 들어가고 마초가 유비에게로 도망치면서 둘의 운명이 갈렸다.[* [[자치통감]]에 마초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저족 부중에서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마초가 이 당시 방덕과 미처 협의를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가 먼저 [[황권]]을 통해 장로를 조조보다 먼저 영접하는데 성공했다면 마초에게도 가족을 비롯해 유능한 심복의 재가세로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마초는 분명 뛰어난 군재를 가진 장수지만 그런 장수도 휘하 부장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 대장의 작전대로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유능한 부장이 있다면 그 장수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마초는 유능한 부관인 방덕을 잃었고, 이는 마초에게 통솔할 중간층의 소실로 한쪽 팔을 잃은 것과 같은 여력 상실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마초는 방덕의 빈자리를 채울만한 중간층을 재건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종합해 보면 독자적인 군벌이었을 때는 충분히 뛰어났지만 타세력 치하로 흡수된 이후로는 군벌 우두머리 시절의 위용을 회복하지 못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마초의 용병술 중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소수의 병력으로 속공과 기습에 능했다는 점이다. 마초의 군사적 커리어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들인 평양 전투에서의 곽원 참살, 동관 전투에서의 조조와의 대결, 농서에서 하후연을 패퇴시킨 것 모두 1만 명 정도의 상대보다 적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적군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을 노려 순식간에 군사를 휘몰아 상대방을 위기에 빠뜨린 케이스다. 곽원과 조조 모두 도하 도중에 마초군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몰렸으며 하후연 같은 경우는 기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곳에서 마초군의 요격을 받아 후퇴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빠르게 육박한 마초의 기습에 당한 상황이라고 봐야할 듯싶다. 확실히 이런 측면에서 마초는 자신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견되기도 했던 급습의 달인 [[팽월]]과 군을 움직이는 스타일이 비슷하다. 파란만장한 마초의 일생에서 가장 정점에 다다랐던 순간은 관서 군벌군의 총수장으로서 당대 최고 군웅인 조조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 것이었지만 실제로 마초가 군을 지휘하는 방식을 보면 동시대 제갈량, 주유, 육손 등처럼 한 국가의 군권을 총괄하는 총사령관의 그것이라기보단 한갈래의 군세를 이끄는 별동대 사령관으로서 한 전선을 책임지고 치고 빠지며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 특화된 모습에 가깝다. 이런 마초의 지휘 스타일에 비춰볼 때 본인이 군권을 총괄하는 상황이 아닌 마초를 콘트롤 할 수 있는 일류 총사령관 산하의 상장으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좀더 좋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지 않냐는 상상도 가능하다. 실제로 마초가 비견됐던 팽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약소한 수적떼의 우두머리[* 그것도 정작 본인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에서 떠밀었다.]로서 속절없이 늙어가던 노인에 불과했던 팽월이 초한쟁패기에 맹위를 떨친 군벌로 급부상하고 종국엔 양나라 왕에까지 올라설 정도로 어마어마한 군공을 누적시킨 비결은 본인조차 몰랐을 법한 타고난 군사적 재능이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기도 했지만 당대 최강의 세력인 항우에 대한 카운터 파트로서 항우군 본대를 상대로 수 없이 얻어 터지면서도 끝까지 항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버텨낸 '''당대의 일류 총사령관 한고제 유방'''[* 본인 라이벌 만인지적 항우와 부하 국사무쌍 한신의 임팩트가 워낙 크기도 하고 초한쟁패기를 다루는 2차 창작물에서 왜곡받은 것도 크게 작용해서 유방의 군재는 흔히 과소평가되지만 사실 유방의 군재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한신과 항우 포함 무조건 당대 베스트3 안에 들어간다. 사실 팽월의 성공도 그렇지만 한신의 북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유방군 본대가 당대 최강의 항우군 본대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게 핵심이었다.]과 제휴했기 때문에 오랫 동안 수적떼와 제후들 용병 생활을 전전하며 조탁했을 급습과 게릴라전에 최적화된 본인의 군사적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났던 요인도 컸다. 즉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래도 만약에 마초가 좀 더 오래 살아 [[제갈량의 북벌]]에 종군했다면 정공법에 능한 당대의 일류 총사령관 제갈량과 속공과 기습에 능한 마초의 콜라보레이션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궈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갈량 본대는 안정된 루트를 따라 전진하며 조위의 주력을 상대하고, 마초는 뛰어난 기동력과 용력을 앞세우며 독립적으로 일군을 이끌어 자신이 서북방 지역에서 갖고 있던 막강한 영향력과 이름값[* 마초는 군재를 떠나서 그 이름값만으로도 반위선전의 최선봉으로 써먹을수 있는 인물이다. 이민족 유화책의 핵심으로 쓸 수 있고, 한중전 당시 회유한 저족규모가 1만여 부락이다.]까지 발휘, 주변의 호족들과 저강의 지원을 받아가며 해당 지역을 휩쓰는 양동작전을 펼쳤다면 삼국지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것과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특히 1차 북벌에선 조운까지 있었으니 마초가 종횡무진 활약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마초가 더 살았다면 남정 땐 50세, 1차 북벌 때는 53세, 그리고 5차 북벌까지 나간다면 59세로 경륜이 쌓일만큼 쌓인 노련한 장수가 된다. 이건 강유가 죽은 당시 나이인 63세보다도 어린 것이다. 실제 관장마황조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사람이 마초일 가능성이 높기에 제갈량 같은 전략이 뛰어난 총사령관이 그의 전술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저강족에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강유가 농서 지역에서 가진 상당 수준의 영향력[* [[강유#s-3|강유가 촉한에 남았던 이유 참고]]. 강유는 제갈량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현의 학문을 좋아하며 입신양명에 관심이 가지고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병사들을 키웠다"라는 기록을 봤을 때 나름대로 입신양명의 꿈이 있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한 유협 세력을 키울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인망과 세력을 갖춘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또 위략에 따르면 1차 북벌 당시 강유는 그 젊은 나이에 천수 기현의 대표자로 나설 만큼 주위의 신망과 인심을 얻던 젊은이였고, 그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인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물이 자신들을 적으로 여기고 배척한 조위 대신 자신의 진가를 더 잘 알아주고 인정해줬던 촉한에 가서 평생 충심을 바쳤다. 강유가 촉한에서 중직을 맡으면서도 꾸준히 해당 지역 사람들, 이민족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은 마초의 농서지역 영향력과 유사한 지점이 많다.]까지 행사할 수 있었다면 관서의 판도는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까지 살아있다 치더라도 마초의 건강이 버틸지는 모를 일이고, 실제로도 지천명을 앞두고 세상을 떴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택과 과오로 일족을 죽음으로 내몬 셈이니 그것 때문에 심신이 많이 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중에 있을 때부터 일족의 죽음에 비통해 하며 각혈까지 했다는 기록을 보아 그의 피폐한 정신상태가 신체적 건강까지 해치게 만들었다는 의심이 충분히 가능하다. 마초가 잘 나가다가 농서에서의 배신으로 남은 가솔들마저 모조리 잃고 한중으로 피신한 이후 갈수록 활약이 미미해지는 걸 두고 심신쇠약과 그로 인한 건강 악화 문제를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제갈량 입장에서도 마초의 이른 사망은 내심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명의 뛰어난 상장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판국인터라 성질 더러운 위연과 찌질한 양의를 화해시키려고 화해를 요청하는 글까지 쓴 제갈량 입장에서 이들보다 커리어와 위상이 압도적으로 높은 '''선제 유비가 임명한 촉한의 최초이자 최후의 영 양주'목'''' 마초가 곁에 있었다면 무척 든든[* 또한 마초 같은 경우는 176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촉한 5대장 가운데 아마 가장 젊은 연배였을 것이고 181년생으로 알려진 제갈량과 가장 비슷한 또래이기도 하다. 친분을 나눌 때 나이가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됐던 시대상을 감안한다면 양자 모두 서로에게 다가가기 쉬웠을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이 관우에게 보낸 편지나 마초가 팽양과 나누는 대화를 살펴보면 제갈량과 마초 모두 서로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의를 비롯 삼국지 관련 2차 창작물에선 주로 제갈량과 조운의 인연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선감을 불어넣는 차원에서 제갈량과 마초의 친분관계를 묘사하는 대목을 부각시켜도 괜찮을 듯 싶다. 사실 제갈량과 조운의 관계에 있어서 사적인 교분이나 서로에 대한 평가가 사서 액면상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공적인 차원에서 제갈량과 조운은 유비가 신야에서 유표의 객장으로 지리멸렬하던 시절부터 적벽대전, 남형주 점령, 입촉, 남반정벌, 그리고 북벌 1차전 같은 주요 역사적 분기점을 통과하며 그야말로 온갖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이고 군주인 유비가 기를 쓰고 추진한 이릉대전 같은 신하로서 감히 거부하기 힘든 정치적 난제에 있어서도 동시에 반대 의사를 표명해 의견합치를 보이는 등, 사서의 맥락과 행간을 읽어보면 두 사람이 충분히 친했다는 결론을 유추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 흔히 간과되지만 제갈량은 관우를 향해서 별명인 "염(髥)"으로 호칭하는 걸 보아 관우와도 사적으로 꽤 친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제갈량이 관우를 견제해서 형주에 방치해 죽게 만들었다는 낭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했을 것이다. 또 본래 융중대에서 서북의 이민족과의 협력을 논하고 있는데 알다시피 이건 당시 강족 혼혈 군벌인 마등-마초와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마초가 보여준 장수로서의 역량 외에도 옹양주를 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징자본이 마초에게 있었다고 제갈량이 판단한 걸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일이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