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초 (문단 편집) === 명성 === 마초는 할머니가 [[강족]]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강족]]과 [[저족]] 등 서북 지역의 이민족들과 가까웠고, 이로써 그는 그들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마등은 강족 어머니 이전에도 수 차례 혼혈이 일어나서 얼굴이 서구인같았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 비율은 [[쿼터]]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당대 이민족들의 혈통주의 문화를 생각한다면 마초가 이들에게 그만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앙의 [[높으신 분들]]은 마초가 [[동한]] 개국공신 [[마원]]의 후손임에도 반오랑캐라고 디스했다. 거기다 이민족과 결탁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후세에는 마초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일단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하자 유장이 그 소식을 듣고 벌벌 떨다 바로 항복했다는 기록이나 비록 터무니없다 부정되었으나 산양공재기에서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한 다음에도 유비의 자를 부를 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당대 마초에 대한 인식은 최소 한 곳을 뒤흔들 만한 제후의 반열로 여겨졌던 것 같다. 즉 명성에서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 [[조조]]와도 자웅을 겨뤄 일시적이나마 조조를 위기로 몰아붙여 당대의 호걸로 여겨졌다. * 마초는 당대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영포]], [[팽월]] 등 고대의 맹장들과 비견되는 극찬을 받았다. * 조조에게 전멸에 가깝게 패하고도 농서 지역을 일부 점유해 금세 일어설 수 있었으며 그가 봉기하자 이민족을 비롯 상당한 세력들[* 그러나 마초가 재기할 때 농서에 집결한 병력이 마초 직계 패잔병, 서북방 여러 이민족, 양앙이 이끄는 장로의 원군 포함 고작 1만 명 수준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 전까지 조위의 자장권이라고 보기 힘든, 외려 마초의 홈그라운드에 가까웠다면 가까웠을 곳에서 결국엔 내부의 친 조조 세력을 방치한 것이 문제가 되어 마초가 농서지역에서 축출된 걸 보면 마초의 전성기는 조조와의 대결에서 참패한 시점에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물론 애초에 농서 지역 자체의 인구가 적고, 마초가 농서 전체의 지배자라기보다는 연합세력의 수장이었다는 점, 농서가 이미 조조의 군세에 패배하며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초에 대한 농서 지역에서의 지지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며, 마초가 농서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 그러니까 저, 강, 장로의 봉기를 유발시켰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마초가 양부를 죽여 내부의 조조 추종세력에 대한 정리를 분명히 했다면 양주는 마초에 손아귀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초 세력 자체가 전투에 특화된 군사 집단이기에 후방에서 내정을 돌볼 문관 성향의 인재가 거의 없었다는 한계가 재봉기 실패의 핵심인 셈이다. 양부는 당시 이미 중앙권력에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이고 또 후에 유엽과 조조로부터 삼공급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긴 하지만 극친조조 성향의 인물인데 오죽 내정을 돌볼 사람이 없었으면 그런 양부마저 아쉬워서 강제로 기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으니...]이 순식간에 호응했다. * [[장로]]에게서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할 때도 이민족인 [[저족]]의 영역을 자유롭게 경유했다. * [[유비]]는 마초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자 "내가 익주를 얻었구나"라며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실제로 [[유장]]은 유비에게 귀순한 마초의 군대가 성도에 당도한 걸 보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벌벌 떨다 유비에게 항복한다. * 호승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관우]]는 마초의 평판에 대해 묻는 내용의 편지를 [[제갈량]]에게 보냈는데 제갈량이 관우가 마초보다 낫다는 평가를 하자 대단히 기뻐해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여줬다고 한다. 제갈량이 눈치 본 감도 있기는 하지만. *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 이미 당대 전중국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칭송받던 [[만인지적]] 관우, [[장비]]와 동렬에 세워졌다. * 좌천된 팽양은 마초에게 반란을 부추기며 "당신이 외부(군사)를 맡고 내가 내부(내정)을 맡으면 천하가 충분히 평정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뻘소리지만 마초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발언이라는 측면에선 의의가 있다. * 양주에서 모든 걸 다 잃고 한중에서 무도로 도망가 있던 시절에도 [[저족]]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후일 [[한중 공방전]] 때 장비와 함께 이 지역 저족을 비롯한 이민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나 유비에게 호응시킨다. 마초의 이민족 영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 [[한중왕표]]에서 당시 유비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의 서열이 어찌 되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데, '''마초가 가장 앞에 있다.'''(평서장군 도정후) 도정후는 본래 조정으로부터 받은 작위고 평서장군은 유비가 임의로 부여한 장군직이다. 아무튼 그의 이름이 가장 앞에 등장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마초가 유비로부터 제후 대접을, 적어도 겉보기상으로는 동등한 입장으로 대우를 받은 게 아닌가 싶다. * [[유비]]에 의해 [[촉한]]의 최초이자 최후의 '''영 양주'목''''에 임명된다. 후에 북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위연]]이나 [[강유]]의 지위가 이보다 한급 낮은 '영 양주자사'였던 걸 감안하면 마초가 갖고 있던 위상과 관서지방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