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사변 (문단 편집) === 우한 정부의 대응 === 부하들의 반란에 탕성즈는 허극상의 당기, 군기 문란을 격렬히 비난하고 장사 전체 군인들로 하여금 우한정부 옹호, 3대 정책 옹호, 장제스 타도를 천명하게 하면서 자신과 허극상의 반란이 무관한 것임을 강조하며 동정군을 조직하여 장제스를 토벌해야 이런 일이 없어질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의 배후인 허젠은 이를 병사들의 자위 행동으로 옹호했고 이품선을 비롯하여 사건과 무관한 장령들도 중앙이 중심을 잡고 사건을 조속히 해결해야한다고 촉구하면서도 이번 사태가 호남공농운동의 '유치병'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다만 허극상에 대해서는 "만약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엄중히 조사하여 처벌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허극상의 반란에 당황한 왕징웨이는 5월 25일 특별위원으로 [[담평산]], [[천궁보]], [[팽택상]] 등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했지만 조사단은 악주에 이르러 허극상 부대에게 쫓겨났다. 이에 왕징웨이가 주최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군대와 농민협회 양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농민협회만을 제지하면 군대가 말썽을 피울 것이니 군대와 농민협회를 모두 징계하여 '군대와 노동자의 충돌'을 '조정'할 것을 밝히고 주장하며 허극상에 대해서는 조사 후 엄격히 처벌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과격한 노농운동 역시 조사,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천두슈]]는 허극상을 하두인처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왕징웨이의 입장 표명에 무력토벌이 타당하지 않다고 입장을 선회하며 "모든 일은 우한 정부의 결정에 따라야 하며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 호남 농민운동의 과격한 행동과 관련이 없지 않다."라며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 과격한 노농운동에 대한 비판입장을 발표하고 담평산을 호남에 파견하여 호남의 과격한 노농운동을 제어하라고 지시했다. 호남성 임시 성위원회는 장사 부근 10여개 현에서 1만명의 농민을 무장시켜 장사를 탈환하려 했지만 중공 중앙의 평화적 해결방침이 하달되자 제대로 된 지휘를 받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허극상에게 각개격파당하고 몰살당하고 말았다. [[적색테러]]에 피해를 입고 분노한 국민당 장교들과 부농들은 총공회와 빈민들을 상대로 가혹한 [[백색테러]]를 감행함으로 보복하였고 호남 지역에서만 1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불과 20여일 동안 공산당의 주장으로 1만명에 달하는 공산당원과 농민협회원이 살해당했고 호남의 당조직은 와해 당하기에 이르렀다. 최종적으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탕성즈의 제안을 받아들여 호남성정부의 잠정 현상태 유지, 호남성 당부 및 농민협회, 성공회의 개조, 장사, 악주 간 부대의 원대 복귀 및 36군 부군장 주란(周斕)을 호남으로 보내 모든 부대를 지휘하게 하고 봉기를 일으킨 군에 대한 조사, 군대 및 공농 무장단체의 군사행동 및 보복 금지를 최종결론으로 하였다. 하지만 호남구당위원회는 국민당 중앙의 결정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고 오히려 호남의 여러 중하급 군관들이 마일사변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허젠이 신임 호남성 정부주석에 추대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설상가상으로 반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제5방면군 총사령관이자 강서성 정부주석 [[주페이더]]도 반공에 동참,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들을 강서성에서 추방하고 난창에서 계엄령을 선포, 노농운동을 금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