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사변 (문단 편집) === 35군의 반란 === ||[[파일:마일사변2.jpg]]|| || 처형당하는 공산당원 ||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5월 21일]] 밤, 장사에 주둔한 허젠의 막료 여상삼(余湘三)의 지휘 아래에 36군 독립 33단장 허극상(許克祥 쉬커샹), 35군 교도단 왕동원(王東原), 유수처 주임 도유(陶柳) 등이 군대를 이끌고 성공총회, 성농민협회, 국민당 장사 시당부, 호남성 당부를 급습하여 공산당원을 상대로 한 폭동과 학살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마일사변이다. 허극상은 공산당원 100여명을 체포하여 총살하고 국민당 호남성당부, 성총공회, 성농민회를 장악한 다음 규찰대의 무기를 몰수하였다. 허극상, 왕동원 등은 와해된 국민당 호남성당부를 재조직하여 각계연석회의를 열고 중국 국민당 호남구당위원회를 조직하여 탕성즈, 장익붕, 허극상, 왕동원 등을 위원으로 추대하여 호남성의 당정대권을 장악했다. 이는 탕성즈의 명령을 받고 하남에서 작전 중이던 허젠이 5월 15일 호남성 연석회의에서 대지주 토지몰수 결의안이 발표되고 자신의 부모까지 농민협회에게 조리돌림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심복 여상삼에게 지시하여 호남에 잔류한 부대를 인솔하여 봉기할 것을 지시한 것이 원인이었다. 한편 허젠은 탕성즈의 호응 여부를 알 수 없으며 이 변란이 장제스의 사주를 받았거나 또는 [[청첸]]이나 [[탄옌카이]]와 결탁하여 탕성즈에 대항하는 봉기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은 5월 13일 하남성으로 북상하여 마일사변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는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마일사변은 허젠의 지시로 일어났음에도 그 주력이 원래 장사 위수부대였던 36군의 허극상의 부대였다. 5월 23일, 마일사변의 주모자들은 성정부 명의로 10개 항목의 포고를 발표하여 농민운동을 탄압하며 [[장제스]]에게 향후 행동에 관한 지시를 내려달라며 장제스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호남성주석 대리 겸 호남성 방위군의 지휘자인 장익붕(張翼鵬)을 통해 탕성즈와 국민당 중앙당부, 우한 국민정부에게도 마일사변의 불가피함에 대해 보고했다. 이에 장익붕은 국민당 중앙에 마일사변은 농공규찰대가 35군 타도를 내걸고 35군을 공격한 것에 대해 35군이 부득이하게 자위행동을 취한 것으로 보고했다. 또한 6월 20일 우한의 중앙정치위원회에 좀더 구체적으로 농민운동으로 인한 전방의 군미와 후방의 식량 수급의 대혼란, 사립은행, 합작사 등의 늑영(勒捐), 토지몰수의 무원칙성, 토호열신 타도운동의 상궤 이탈, 징세기관 및 각현 관리의 작의적 착취와 구타, 체포, 군인 가옥의 몰수와 가족에 대한 박해, 농군 조직과 주둔부대와의 상호 알력, 중앙정치부 학생대에 대한 무기 몰수와 총지휘부의 군미 구매에 대한 거부, 그에 대한 병사들의 공포가 사건의 원인이라 보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