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사변 (문단 편집) === [[양썬]]과 하두인의 반란 === 한편 [[4.12 상하이 쿠데타]]로 절강, 강서, 강소, 복건, 광동 등 부유한 남방과 동방 지역을 모두 잃은 우한 국민정부의 경제 위기는 더욱 극심해졌다. 신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탕성즈]]와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일부 공산당원들은 난징 국민정부를 먼저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총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정치부장 [[덩옌다]], 8군 정치부 주임 팽택상 등이 북벌을 주장하여 우한군은 하남성을 향한 북벌에 나섰다. 이를 위해 탕성즈 산하의 35군과 36군이 북상하고 이품선이 우한 위수사령관에 임명되어 8군을 거느려 호북에 주둔했다. 그러던 중 5월 9일, 사천성 동부에 주둔한 20군 군장 겸 사천-호북 변방사령 양썬(楊森 양썬)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우한 국민정부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켰다. 양썬은 의창을 점령하고 총공회와 농민협회를 해산한 다음에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 살해했다. 그리고 우한 정부를 토벌하자는 통전을 보내 자신에게 동조할 것을 촉구했다. 5월 12일[* 혹은 5월 13일.], 의창에 주둔하던 국민혁명군 14독립사단장 하두인(夏斗寅 샤둬인)이 양썬에게 동조하여 반공통전을 보내 반란을 일으키고 5월 17일 우한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간 공산당의 폭동에 시달리던 지주와 우익 인사들이 이들에게 적극 협력하여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한 공산당원과 농민, 노동자들을 상대로 잔혹한 [[백색테러]]를 감행하여 보복하였다. 하두인은 5월 18일 우한 인근 지방(紙坊 저팡) 지역까지 진출하여 우한을 위협했고 겁에 질린 정부 인사들이 피난을 준비했으나 중앙농민강습소 학생과 우한 군사정치학교 생도, 무장공인규찰대 및 우창 경비사령 겸 제4군 독립사단장 예팅을 파견하여 하두인의 공격을 분쇄했다.[* 이때 마오쩌둥도 우한 방어전에 참여했다.] 5월 25일, 우한 국민정부는 서정군을 조직하여 양썬 부대를 완전히 토벌했고 여세를 몰아 6월 24일 의창을 탈환했다. 양썬은 수로와 육로를 통해 파동 (巴東 바둥)으로 패주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더 이상 하두인의 부대를 추격하지 못하게 하면서 하두인은 호북성 동남쪽 일대에 주둔하며 공산당 숙청을 계속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