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사변 (문단 편집) === 우한 국민정부 내부의 혼란 === 우한 국민정부는 4월 19일 독자적인 북벌을 재개, [[펑위샹]]과 연대하여 하남성을 점령하였으나 경제적인 불안이 심각했다. 광동, 복건, 절강, 강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이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했기 때문에 우한 국민정부는 호북, 호남 양호 지역에서만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양호 지역은 [[우페이푸]]의 학정으로 남발된 지폐와 세금 징수 때문에 경제가 파탄이 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한 정부는 통치에 필요한 최소 자금의 10%만을 겨우 충당할 수 있었는데 그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의 90%도 공채 판매와 자본가, 지주들을 공격해 그들의 재산을 압수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공산당의 선동으로 흥분한 노동자와 농민, 점원들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경제를 마비시켰는데 중국 공산당조차도 당시의 요구가 '좀 무리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한의 혁명광기가 지나치게 심해지면서 공산당마저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고 쌀의 유통이 중단되고 파업이 이어졌다. [[류사오치]]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노동자는) 기업을 도산시키자는 구호를 내걸고 임금을 놀랄 만한 수준으로 인상시키고, 노동시간을 일방적으로 하루 4시간 이하로 단축시켰다. 제멋대로 사람을 체포하고 법정과 감옥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기선과 기차를 검문하여 교통을 마비시키고 공장과 점포를 몰수하고 분배했다. 이런 현상은 그 무렵 지극히 흔해 빠진 일이었다. 노동조합은 최고의 정부였고 가장 큰 권력을 보유했으며, 그 힘이 때로는 정식 정부를 능가했다." 경제적 손실을 이기지 못하고 폐점하거나 철수하는 상점과 기업이 늘어났고 우한 정부는 현금집중조례를 발표해 은화를 확보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민중운동을 억제함으로 혼란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금집중조례와 화폐 남발로 오히려 화폐의 가치가 폭락해 인플레이션이 덮쳤고 실업자의 수가 1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물가가 안정된 난징 정부와 비교되었다. 우한의 민심이 악화되면서 우한은 내부로부터의 소요에 직면했다. 거듭된 혼란 때문에 우한은 물론, 공산당 내부에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다. 일부는 코민테른의 1926년 결의에 따라 우한 정부가 '비자본주의' 발전을 하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부는 국민당에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 요원들도 의견 합의를 보지 못했다. 마헨드라나트 로이는 국민당을 압박하여 급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하일 보로딘은 그러한 행위가 우한 소속 장령들이 반공의 길을 선택하게 만들 것이라고 반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