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사변 (문단 편집) === 영한결렬 === 1924년 [[국공합작]] 이래로 국민당 내부에는 국공합작을 옹호하는 좌파와 국공합작이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여 국민당을 내부로부터 잠식하려는 술책으로 판단한 우파의 갈등이 이어져왔다. 1925년 쑨원 사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우파들이 대거 숙청되거나 [[서산회의파]]로 분할되면서 국민당 광저우 중앙은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주도했지만 1926년 북벌 시행의 문제를 두고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빚어지던 중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의 입지는 약화되고 국민당의 지도권은 장제스가 통솔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여 북벌에 나섰고 1927년 4월에 이르러서는 [[우페이푸]], [[쑨촨팡]], [[장쭝창]] 등의 군벌들을 격퇴하고 하남, 산동까지 [[국민정부]]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전열을 정비한 공산당은 국민당 좌파와 연합하여 장제스를 군사 독재자, 기회주의적인 군인으로 비난하며 장제스의 권력 약화를 시도했고 1927년 국민정부의 수도가 우한으로 이전한 이후 갈등이 격화되었다. 우한에서 수립된 국민당 좌파의 연석회의는 장제스의 일부 직책을 폐지, 권력을 회수하였고 [[난징사건]] 이후 장제스가 열강과 협상하면서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고 상하이의 규찰대를 무장해제하려 하자 장제스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을 박탈, 장제스에게 상하이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이에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자적인 청당에 들어갔고 국민정부는 기존의 우한 국민정부와 4월 18일 난징에 수립된 난징 국민정부로 분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