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평가 (문단 편집) == 정치 == [youtube(sCi-2iSpzow)] >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부터 당이 걸어온 역사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비공개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천윈]]이 이런 고백을 했다. >"만약 마오 주석이 1956년([[대약진 운동]] 이전)에 서거했다면[* 현재에도 중국에서 공식 석상에서는 마오쩌둥을 일컬을 때 꼭 마오 주석이라고 경칭을 써야 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과는 달리 사석에서까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겁니다.[* 이때 마오의 나이가 62세로 당시 평균수명으로 처도 오래 살았다.]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이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퇴색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덩샤오핑은 마오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을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회상했다. 마오는 스탈린이 70%의 위업과 30%의 과오를 남겼다(공칠과삼, 功七過三)고 평했었다. 덩은 마오쩌둥의 행적도 대략 비슷한 비율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다분히 냉소적으로 말했다. 덩의 발언은 일종의 공식 판결이 되어 마오를 비판할 때마다 으레 나오는 말이 되었다. 덩은 중공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탈마오주의' 선전은 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1981년 6월 27일 마오쩌둥은 데이비드 샴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중주의적 폭군(populist tyrant)이라고 불리운 유형의 정치가로, 이런 유형의 정치가가 그렇듯 굉장히 평가가 갈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 마오쩌둥은 대중들에게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호소했고, 그들을 동원하려고 했던 반엘리트주의적 요소가 강한 정치인이었다. 마오쩌둥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대중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대중을 동원하여 관료제에 대항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1956년 이후에는, 대중을 반복적으로 국가관료조직에 대항하는 식으로 사용했다. 그는 민중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 사회를 문화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했고, 정부기관, 관료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힘으로 대중들에게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뛰어넘었다. 이것이 그의 대중주의적 요소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로 체제가 전환된 이후에도 끊임없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혁명을 국제적으로 전파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의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만들어낸 중국 공산당의 정치 체계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비해 폭압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정책과 정치체제 하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죽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는 히틀러와 스탈린, 히로히토가 학살한 사람의 수를 합친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식의 평가에서는 마오쩌둥은 혁명가로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로 끝났다고 본다. 중국 공산당에서조차도 마오는 분명 성공적으로 공산 혁명을 완수했지만 집권 중에 저지른 실책은 상당히 많다고 여긴다. 이것은 중국 내에서도, 중국 밖에서도 많이 보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성공한 혁명가, 실패한 정치가'로서의 관점은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근대 군주로 치면 [[시황제]], [[이존욱]],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자신이 속한 나라를 통일한 업적과 이후 그 나라를 자기 손으로 다시 혼란에 빠뜨린 실책이 공존하여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이 된 인물들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일단 첫째로는 그가 '성공한 혁명가'였는지의 문제가 지적될 수 있고, 둘째로는 그가 '실패한 정치가'였는지의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에서 그는 이 평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려고 시도한다.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엄청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인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중국의 인구 및 기대수명은 마오 시기 때에 급격하게 증가했고, UN에서의 상임 이사국도 되는 등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1041350/life-expectancy-china-all-time/|중국 기대 수명의 변화]]] 하지만 결국 현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중국은 강대국이 되었기는 했지만, 정치 체제도 민주적이지 않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아닌 실질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느냐는 이유를 들어 정치가로서의 마오는 강대국 중국의 유산을 남겼지만, 혁명가로서의 마오의 영속적인 유산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정치에 마오가 남긴 유산이 굉장히 모순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유산은 마오가 구성한 굉장히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중앙 정부가 있고, 동시에 조반유리로 대표되는 그러한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민중주의적인 요소이다. 마오는 문화대혁명기에 자기 자신이 구성한 공산당에 굉장한 위기를 불러일으켰으나, 이를 대체할 새로운 탈권위적인 정치 질서를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마오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현재의 공산당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다 보니, 현재의 집권 정당인 중국 공산당도, 그 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도 모두 마오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