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평가 (문단 편집) ==== 베트남 ==== 공산국가이지만, 중국과 역사적으로 앙숙인 [[베트남]] 역시 마오쩌둥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 중공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 미국과 싸우긴 했지만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 사실 호찌민도 미국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적대/배척하여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손을 잡아 중국을 견제하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자세한 건 [[미국-베트남 관계]] 문서 참조. 거기에 생애를 보면 알겠지만 호치민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단 공산주의를 수단으로 사용한 민족주의자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조차도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을 경계했을 정도였으며,[* 호찌민은 1960년대 말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 갔던 외교 특사들을 통해서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에서 일어나던 홍위병들의 폭력, 파괴 행위와 마오쩌둥이 자행하고 있는 폭정들의 실상을 전해듣고 난 뒤 '이런 건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며 문화대혁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각각 호찌민, 마오쩌둥 사후에는 [[중월전쟁|양국 간 전쟁]]도 벌였으니, 오죽하면 베트남 국민들이나 역사학자들조차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국민들 수천만명을 죽이던 것에 비하면 차라리 [[호찌민]]이라도 국가를 제대로 다스리고 간 게 천운이었다고 평가할 정도이며 오늘날 베트남의 국민들도 중국 국민들의 앞에서 '그래도 호아저씨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굶겨죽이거나 집단광기를 일으켜서 국가를 망치는 짓은 안 했는데, 너네 나라 국부라는 사람은 뭐했냐?'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할 정도로 마오쩌둥을 모국의 호찌민과 비교하며 마구마구 비난한다.[* 호찌민 역시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토지 국유화에 반대하던 농민, 노동자들의 시위, 파업을 유혈진압을 한 전적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학살해 죽인 사람들보다는 그 규모가 작았다. 그리고 국가 체계 정비 과정에서 벌어진 농민들의 저항을 군경의 유혈진압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비판과 논란이 오가자 자기 스스로 민주적으로 분란을 막지 못했다며 과실을 인정하고, 정책을 주도한 책임자 일부를 경질하는 등 비교적 수습도 잘했기에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부정하는 행보를 보이던 마오쩌둥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실제로 호찌민과 마오쩌둥은 살아생전에도 공산주의 통치 과정에서 반동분자에 대한 처리 방식과 해석을 두고 논쟁을 벌인 적도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반동 우파 인사들은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사회주의 체제 확립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 반면, 호찌민은 자본가 등 공산주의에 반하는 반정권 인사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일방적인 살육에 기반한 숙청은 정권 확립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마오쩌둥의 극단적 주장에 반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