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산아재 (문단 편집) === 탄생 === *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2682&page=9&total=7080|창원야구 100년사 (13) 프로야구 출범과 마산, 롯데자이언츠 제2 연고지로 존재감 뽐낸 1982년]] *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3939&page=8&total=7080|창원야구 100년사 (15) 지역 팬들 유별난 열정, 마산만 오면 죽쑤는 롯데 아재 마음은 불타오르네]] >이른바 '곤조'라고 하나요, 타고난 기질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다르게 표현하면 근성이 강한 거죠. 제 현역 시절에도 다른 지역 선수들과 비교해 마산 선수들이 근성 면에서는 최고였어요. 마산상고가 어느 대회 8강에서 광주일고한테 졌어요. 그날 저녁 식당에서 서로 마주쳤는데, 광주일고 선수들이 슬슬 피해 가더군요. '''우리가 기 싸움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았죠.''' > ---- > 이재문 경남야구협회장[* [[마산용마고등학교 야구부|마산상고]] 감독을 역임했다. 감독 당시 제자가 [[장원삼]]이다.] >'''어떨 때는 마산상고 출신이 롯데 주전으로 8~9명씩 뛰고 그랬습니다. '롯데는 마산상고 없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마산 팬들은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당연히 컸고요.''' > ---- > [[한문연]] NC 다이노스 코치 1904년 공식적으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황성 YMCA 야구단'을 창단한 이후 전국적으로 야구단 설립 열풍이 일었는데, 이 대열에 동참한 것이 당시 마산(현 창원) '창신학교(현 창신중·고)'였다. 1906년 설립된 창신학교는 1914년 학생들에게 진취적인 의식과 행동을 심어주기 위해 야구부를 만들었고,[* 지역사 연구가 박영주는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96285&page=18&total=7080|"창신학교에는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았죠. 마산 야구 탄생은 이분들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특히 [[안확]] 선생이 체육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야구는 팀 경기잖아요. 조선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본을 이기기 위한 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의미입니다."]]라 풀이했다. [[일본 제국|일제]]가 이러한 분위기를 경계할 수도 있었지만, [[호주]] 선교사가 세운 학교라는 점이 야구 도입 초창기 일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울타리 역할을 했다.] 이후 마산 지역의 야구 확산을 주도하며 하나의 대중문화이면서도 민족주의의 뿌리를 이끌었다. 1920년대 마산에서도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이 심심찮게 [[야구]]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98240&page=16&total=7080|여럿 남아있어]], 오늘날에는 조선 사람들이 팀 경기에서 힘을 합쳐 일본을 이기겠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16747|기사]]. || [youtube(/UY_Hyz3y6xI)] || 해방 이후 1947년 마산상업중학교(현 마산용마고)와 마산중학교(현 마산고)에 야구부가 창단하며 지역 고교야구 시대를 열었고, 1949년 전국도시대항 야구대회에서는 결승에서 석패하자 최초로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99624&page=15&total=7080|단체 삭발]]을 감행하기도 했다. || [youtube(3LHisDzRx-I)] || || 1970~80년대 용마고와 마산고 야구부 경기 영상 || 1982년 프로야구가 태동하며 지역 안배, 특히 시장성을 중심으로 각 구단 연고지가 정해지면서 [[마산시|마산 지역]]은 프로야구 출범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단독적인 지역 연고팀 없이 부산과 함께 롯데 연고지로 묶인 것인데, 다소 아쉬운 상황 속에서도 마산은 특유의 존재감을 뽐냈다. 시즌 개막 전 전지훈련 장소로 각광 받은 게 한 예로, 6개 팀 중 가장 먼저 코치진·선수 계약을 끝낸 OB는 1982년 2월 1일 마산에 스프링 캠프를 차렸다.[* 당시 OB의 마산 전지훈련 분위기를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봄의 고향 마산은 프로야구 열기 속에 새 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들떠있다. 가고파 시인 노산 이은상 씨를 낳은 문학의 고장이자 항도인 마산에 프로야구 OB베어스 팀이 스프링 캠프를 차리면서 시민 관심은 온통 프로야구에 쏠려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평화스런 남쪽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무학산 기슭의 마산고 교정은 시골 잔칫집처럼 부산하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곰들(베어스)을 조련시키는 훈련 광경은 실업팀에서 볼 수 없는 조직적이고 강도 짙은 것이어서 호기심 어린 구경꾼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지훈련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이들 지역 프로야구 열기는 그 해 9월 [[마산 야구장]]이 준공되면서 더욱 치솟았다. 준공을 기념하고자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린 데 이어 시즌 종료 후에는 비공식 시범 경기까지 개최하게 된 것.[* 1982년 11월 12~14일 마산 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시범 경기에는 [[MBC 청룡]], [[OB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가 참여했다.] 이 시범 경기는 '경남에서도 프로야구 붐을 조성하겠다'는 전략을 안고 열렸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마산 사람들의 그칠 줄 모르는 야구 사랑은 프로야구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이는 훗날 '마산아재'로 대표되는 지역 야구의 도약 기틀이 됐다. 마산에서 열린 첫 프로야구 경기는 1982년 9월 26일 [[롯데 자이언츠]]-[[삼미 슈퍼스타즈]]전이다. 경기는 [[마산 야구장]] 준공을 기념해 열렸는데, 마산을 비롯한 경남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입장권 예매분 1500매가 삽시간에 매진된 건 시작에 불과했다. 경기 개시 전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관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용인원의 2배를 넘어섰다.[* 당시 마산야구장 수용 인원이 1만 5000명이었는데, 무려 3만여 명이 몰린 것이다.] '''질서를 잃은 몇 관중은 유리창과 셔터를 부수고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고, 시구를 하기로 한 도지사조차 입장하지 못한 채 경기가 시작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마산 사람이 내비친 야구 열기에 놀랐던 것인지, 그 해 말 롯데는 마산시에 2억 원을 기부하며 '마산 야구장 야간 조명 설치'에 힘을 보탠다.[* 이 조명탑 중 1개는 2003년 태풍 [[매미(태풍)|매미]] 때 사상 초유의 강풍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이듬해 조명 설치 작업이 마무리되고, 롯데가 마산야구장 방문 경기를 늘리면서 이 지역 프로야구 시대도 활짝 열렸다.[* 이 시기 마산과 진해 출신 유명 야구인들로는 [[롯데 자이언츠]] [[정학수]], [[박용성]], [[유두열]], [[한문연]], [[삼미 슈퍼스타즈]] [[감사용]]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