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산아재 (문단 편집) ==== 주요 사건들의 실체 ==== || [[파일:external/ph.idomin.com/410493_314476_251.png]] || 경남도민일보의 남석형, 주찬우 기자가 2013년 4월 10일 작성한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0493|기사]]에 따르면, 베스트 10 중에서 새총 저격 사건과 용접기 사건은 거짓이라고 한다. * 먼저 새총 저격 사건. 위의 기사는 물론, [[SBS]] ESPN에서 방영한 [[https://youtu.be/So-hB-PIbJ4?t=3m59s|야구본색 3화]]에서 거짓임을 밝혔다.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면 피해자였을 [[성영재]]가 새총에 맞은 기억은 없다고 한 시점에서 거짓 확정. 하지만 몇몇 마산아재 전설의 신봉자들은 빗나가서 그랬지 실제로는 쐈다는 주장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성영재]]가 기절해서 기억을 잃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로야구를 원년 때부터 중계해온 [[허구연]] 해설도 어긋난 팬심에 가장 심한 것은 뭔지 아느냐 하며 [[한명재]] 캐스터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 새총 저격을 언급하였다. 사실 [[한국프로야구]]에서 새총 저격이 벌어진 적은 '''있다.''' 그러나 장소가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야구장]]이었고, 피해자는 [[롯데 자이언츠]] [[투수]] [[김종석(1964)|김종석]]이었다. 허구연 위원이 이야기한 사건은 [[http://sports.media.daum.net/sports/newsview?newsId=20130131101703811|이쪽]]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2015년 5월 2일(토)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허구연 위원이 해당 사건을 "광주"에서 일어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비슷한 사건이 '''[[1980년대]]에 여러 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이야 TV 중계가 일상인 프로 스포츠지만 당시 80년대만 하더라도 TV는 부의 상징이었고, 당시 방송 통폐합 때문에 방송사도 몇 없었다. 오죽하면 [[MBC]]가 팀을 창단하게 설득한 이유도 원활한 생중계를 위해서였다니 말 다했다. 그나마 남은 기록도 대부분이 기록물로 남기 힘든 라디오 방송인 경우도 많았으며, 녹화본이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필름이 귀해서 이미 녹화된 후 보관 중인 필름에 다시 녹음을 하는 경우도 흔했기 때문에, 당시에 해당 사건이 있었어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확률도 있다. * 경남도민일보의 취재에서는 용접기 사건에 대해 거짓이라고 했지만, 이 사건은 다른 미디어 매체, 2019년 3월 엠스플의 유명 [[롯데 자이언츠]] 팬인 하동갈매기에 대한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사실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http://www.mbcsportsplus.com/news/?mode=view&cate=1&b_idx=99858792.000|기사]], 또한 [[https://youtu.be/So-hB-PIbJ4?t=4m24s|야구본색 3화]]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문 자체를 용접기로 녹여버린 건 아니지만 "산소용접기"로 "자물쇠"를 녹여서 들어왔다'는 식의 내용과 삽화를 담아 방송을 했다. 해당 방송대로라면 용접기로 문을 녹였다는 표현만이 "엄청난 과장" 이었을 뿐, 어쨌든 용접기로 자물쇠를 녹여서 문을 따고 들어갔으므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과장은 되었지만 거짓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마산아재들이 용접기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의 지역신문 기사에 따르면 여러 명이 합심해서 자물쇠까지 채워진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것은 실제 있었던 일로 보여진다. 문을 녹였든, 자물쇠를 부쉈든 녹였든 간에 마산아재들이 마치 [[리니지(게임)|리니지]] 게임 속 공성전마냥 '''멀쩡히 잠긴 경기장 문을 따고 난입한 건 사실로 보여진다.''' 또한 용접기 사건과는 별개로, 특고압이 흐르는 조명탑과 경기장 지지대를 타고 문 닫힌 경기장에 난입한 것도 역시 사실이라고. * 즉석 청문회 사건은 실제로 벌어졌지만, 초반 버스 앞에 들어눕고 욕설을 하며 살인이라도 날 법한 흉흉한 분위기였지만 한참 뒤 [[김용희]] 감독이 모자를 벗으며 90도로 인사를 하면서 나오면서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 다음 경기를 위해서 이동해야 하니 길을 열어 달라"''' 고 말하고 몇몇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하자 마산아재들은 언제 그랬냐는 둥 "''' 빨리 나와 드려라! "''' 하며 교통정리를 하고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 * 관중들이 제 3 세력으로 가세했다는 전설은 [[야구]]가 아닌 [[축구]]가 그 기원으로 보인다. [[1987년]] 마산공설운동장[* 현재의 [[창원 NC 파크]] 항목에 나와있듯 당시는 야구장이 아니라 축구장이었다.]에서 열린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한국 A팀과 [[이집트]]의 경기가 그 사건이다. 그때가 '''[[6월 10일]] [[6월 항쟁|바로 그 날]]'''이었고, [[4.19 혁명#s-3.3|민주화의 성지]]였던 [[부마민주항쟁|마산 시내]]에서도 격렬하게 시위가 진행 중이었는데, 경기 도중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매우 많이 일어났기에 최루탄에 익숙했던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큰 동요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집트 선수 중 다수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 사이에 한국 선수들이 골을 넣었기는 했지만 이집트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이상을 보이자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도 웅성웅성거렸고 결국 주심은 해당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몰수무를 선언하며 경기를 종료시켰고, 이 장면은 KBS 1TV를 통해서 갑자기 방송이 끊기는 초대형 방송사고까지 겹쳐 전국적으로 생중계되었다.[* 지금이야 잊혀진 경기가 되었지만 당시 대통령배는 아시아에서 그나마 규모가 좀 되는 국제경기였다. 지금으로 치면 아시안게임이나 FIFA 공인 A매치 토너먼트가 벌어지는 경기장 바로 옆에서 독재정권이 최루탄을 쏴재끼는 초대형 나라 망신을 전국에 생중계한 것. 이 때문에 TV를 보던 마산시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허무하게 경기가 끝나자 경기 전에 강제로 표를 사야 했던 마산 관중들이 표 환불을 요구하며 주최 측에 대거 항의하다가[* 당시 마산 시민들 대부분이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을 지지하다 보니 [[전두환]]과 [[민주정의당]]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이 주관하는 축구 대회의 표가 팔릴 리 없었고, 결국 대다수 관중들은 [[강매|강제로 동원된 유료관중]]이었다.][* 오죽하면 부산 시민들은 [[전포동]]을 두고 '''전'''두환도 '''포'''기한 '''동'''네의 약자라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 전포동의 바로 남쪽에 남구 [[문현동]]이 있는데, 문현동의 문현교차로는 단골 反5공 시위 장소였다.] 그런데 [[먹튀|운영측은 환불을 해주지도 않으면서]] 미숙한 대응으로 일관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결국 3만명이 넘는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이들은 그라운드에 난입하여 항의했다. 운동장 바깥으로 나가자 때마침 마산 시내에서 전두환을 타도하자는 시위를 벌인 시위대에 합류하여 시위대 숫자는 1500명에서 '''3만 5천'''까지 불어난다. 시위대에 있던 아재 대부분은 10대~20대 시절엔 [[4.19 혁명]][* 그것도 그냥 겪은 게 아니라, [[3.15 부정선거]] 당일 바로 [[3.15 의거]]를 일으켜 4.19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을 경험했고, 불과 8년 전인 1979년에는 '''[[부마민주항쟁]]'''을 겪은 산증인이었다. 당시에도 전국구급 시위를 하던 마산아재였는데, 27년 전의 잘못을 반복한다? 당연히 마산아재들의 분노는 끝을 모르고 치솟아 올랐고, 이 시위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시위 진압 경찰들이 인근 [[창원시/통합 이전|창원]]으로 후퇴했고, 이후부터 진입하려 하면 패퇴하고 물러갔다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인근 창원과 부산에서 인원이 충원되었는데도 패퇴했다.''' [[https://youtu.be/Lx6g4Mpf-QE|당시 사건에 대한 영상]]. 다만 당시 서울의 시위조차 통제가 불가능해 지방의 경찰 인력까지 마구잡이로 빼내 서울로 차출해 가던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노한 동네 사람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해봐야 경찰에 속한 동향 친구들의 의욕이 있을 리 없다. 거기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도 어느 정도 암묵적인 룰이 존재하기도 했다. 예시로 부마항쟁의 경우 [[5.18 민주화운동]]에 비해 비중은 작지만 '''[[차지철]]이 '100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 질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상황이 심각했으며, 그 이전에는 이미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었다.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하지 않았다면 5.18 민주화 운동보다 더 큰 규모의 사상자가 나왔을 지도 모르는 지역이다. 그렇다보니 지역 내에서 서로 알력은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 같은 경남 해안권 사람[* 특히 해안 지역의 경우 동서양을 막론하고 '뱃문화'라는 특유의 문화로 엮이거나 유대감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이라는 정서적 유대감에 더해 이전에 있던 여러 민주화 운동으로 생긴 암묵적 합의 등이 형성되어 있다 보니 진압이 되는 게 이상한 거다.[* 사실 이 전통은 한동안 부울경 지역에 그대로 내려왔다. 시위가 한참 극심했던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시위대와 진압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야구 으찌 됐는교?" "짔다는데예." 같은 대화가 시위대 앞줄 아재와 전경부대 중대장 간에 오고 갔다고 전해진다. 과격 시위의 맥이 끊긴 현재는 과거의 이야기.] 이후 시위대는 마산시내 파출소를 방화하고, '''[[우병규|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사무실로 쳐들어가 [[전두환]] 및 국회의원의 [[사진]]을 불태우며''' 새벽까지 [[경찰]]들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당시 두 명의 시위 인원이 반쯤 불탄 전두환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는데, 6월 항쟁 이후 지역 언론에서 이 인원의 정체를 찾아다녔지만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57257|같은 시기 부산에서 있었던 일(4장 참조)]]이나 1988년 5월 25일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0493|빙그레전에서 역시 최루가스로 1시간 동안 경기가 중단된 사건]] 등과 결합되면서 현재의 전설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http://www.610.or.kr/board/content/page/26/post/526|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