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사다 (문단 편집) ==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 마사다 항전 ==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유대교의 파벌 중 하나인 [[열심당원]][* 젤롯당(Zealot黨)이나 시카리당(Sicarii黨)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발음은 [[질럿]](Zealot).]이 마사다에 주둔하던 소수의 로마 수비대를 쫓아내고 마사다를 되찾았다. 유대-로마 전쟁의 전황이 로마쪽으로 기울어진 70년, [[예루살렘]]마저 함락되자 도주한 열심당원의 지도자인 엘리에젤 벤 야일(Eleazar ben Ya'ir)이 휘하 열심당원과 소수의 일반 유대인까지 대략 천여 명을 데리고 마사다로 대피, 로마에 대한 [[게릴라]]전을 시작한다. 이들 외에도 헤로디움, 마카에루스 등의 요새에도 저항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마사다보다 먼저 무너졌다. 로마군은 이들을 무시했으나 이들은 무려 3년 넘게 마사다에 틀어박혀 주변 마을이나 도시를 공격했다. 예루살렘 정복 후 기념주화까지 발행하며 승리를 자축하던 로마였지만 피해가 누적되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군대를 파견, 기나긴 유대전쟁의 마침표를 찍고자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Lucius_Flavius_Silva|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로마군은 제10군단 장병 9천 명과 유대 노예, 노역인으로 이루어진 6천 명을 포함한 총 1만 5천 명을 동원하여 마사다 점령에 나섰다. 로마군은 우선 마사다 주변 지역에 8개 요새를 건설하고 벽을 지어 포위망을 형성했으며 수적 우세를 앞세워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마사다에 있는 인원은 1천 명도 안 되고, 여성과 아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던 터라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인원은 소수였다. 그러나 헤로데 대왕이 작정하고 건설한 마사다 요새는 약 450m 높이의 바위 절벽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로, 5m가 넘는 높은 성벽과 20m가 넘는 37개의 망루까지 있는데다가 진입로가 오직 뱀처럼 꼬인 정면 길밖에 없는 [[난공불락]]이었다. 이런 지형 특성상 공성병기 동원도 불가능한 마사다는 철벽을 자랑했고 로마군의 마사다 공략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마사다가 위치한 유대 광야는 광활한 사막으로 밤낮으로 무더위와 혹한이 공존하는 극한의 환경을 자랑해 식량, 식수 등 각종 보급에 차질이 잇따라서 부대를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무려 2년이 이어졌고 로마군의 실바 사령관은 고심끝에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무모한''' 방법을 동원했다. 마사다 요새에서 가장 성벽이 낮은 서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산이 있었는데, 이곳에 [[안시성 전투|토산(土山)을 쌓아]] [[발리스타]] 등 공성병기를 배치하여 공격을 가하고 마사다까지 흙과 나무를 차근차근 쌓아 비탈길을 만들어 공성추를 전진시키는 방법이었다. ~~[[공병]]들은 그 시절에도 수고가 많았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의 의도가 적중한다면 난공불락의 마사다도 함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총 인원 1천 명 중 많아봐야 수백 명 정도만이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상황에서 외부로 내보낼 수 있는 인원은 더더욱 적다. 더구나 작업에 동원된 인원 모두가 노예로 끌려온 '''같은 유대인들'''인데, 막을 힘도 없지만 나가서 이걸 막게 되면 '''[[팀킬|같은 유대인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셈]]'''이 된다.] [[파일:external/phenomena.nationalgeographic.com/lookandlearn-B184511-81.jpg]] '''비탈길을 만들어 마사다를 공격하는 로마군'''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토산과 비탈길이 완성되자,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공성병기]]를 동원해 공격을 시작한다. 마사다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성벽 뒤에 또 다른 성벽을 쌓으며 방어를 강화했으나, 지형적 우세를 상실한 이상 오래 버틸 방법은 없었다. 결국 성벽이 붕괴됐지만, 로마군은 재정비를 위해 일시 퇴각한다.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유대인들은 모두 모였고, 로마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극단의 선택'''을 감행한다. 물러난 로마군은 마사다에서 피어오르는 큰 불길을 보고 당황하여 황급히 요새로 올라갔다. 폐허가 된 마사다에 남아있는 건 수백 구에 달하는 유대인들의 시체였다. 로마군은 주변을 수색하여 하수도, 우물 등지에 숨어있던 5명의 [[어린이]]와 2명의 노파를 발견해 자초지종을 물었다. 남은 유대인들은 유대교 가르침에 반하는 [[자살]]을 할 수는 없으니--[[십계명|살인도 하지 말라 했을 텐데]]-- '''[[계백|모든 결혼한 남자들이 자기 처자를 죽이고]], 남자들 중 10명을 뽑아 이들이 나머지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남은 10명끼리 추첨을 통해 다른 이들을 죽일 최후의 한 명을 뽑고, 이 마지막 한 사람이 요새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으로 모두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마지막 1명은 동포들을 위해 유대교의 가르침을 어쩔 수 없이 어긴 셈이다. * 로마군에게 물자를 넘기지 않으려고 창고에 불을 질렀다는 기술도 있는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창고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 로마군에게 자신들이 절망해서가 아니라 자부심과 신앙에 따라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창고를 불태우지 않았기 때문에 약 2000년이 지나 살아있는 대추야자 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 1963년에 이스라엘 조사단이 마사다를 발굴했을 때, 로마군의 포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휘소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지휘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과 사람 이름을 적은 토기 조각 11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11개 중 하나에는 지도자였던 엘레에젤 벤 야일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이게 마지막 추첨에 사용된 도구일 경우 마사다에 남은 최후의 유대인은 10명이 아니라 11명이었던 게 된다. 벤 야일이 최후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고 끝까지 동료들을 이끌었다고 하면 "벤 야일 이외의 10명"을 뽑고 이들 11명이 마지막 추첨을 했다고 해도 말은 된다. 그렇게 마사다는 한 줌의 잿더미가 돼서야 로마인들의 손에 떨어졌고, 마사다에서 살아남은 7명의 유대인들은 로마군이 유대인들의 용기에 감탄한 것인지, 정신나간 광기에 질린 것인지 모르겠으나 모두 살려주었다. 이후 마사다는 적어도 40년은 로마군 주둔지가 되었다. 5~6세기에는 소수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완전히 버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