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부팡 (문단 편집) === 서북왕 === 1932년 1월, [[후쭝난]]이 중앙군 제1사단을 이끌고 감숙성 천수로 진주하여 마부팡 세력 진압을 도모하기 위해 부사단장 팽진지를 청해성에 파견하자 당황한 마부팡은 1932년 2월, 청해성 남주 옥수에서 티베트 승려를 폭행하여 티베트와의 갈등을 조작하였고 [[달라이 라마 13세]]가 병력을 파견하자 일부러 퇴각했다. 이에 장제스가 후쭝난에게 티베트군을 격퇴하라고 지시하면서 중앙군의 관심사는 티베트 쪽으로 바뀌었고 마부팡은 후쭝난의 공격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32년에 이르러 마부팡은 [[류원후이]]와 합작하여 티베트군을 크게 격파하고 청해성 남부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다. 이 와중에 1933년 41군 군장 [[쑨뎬잉]]이 청해둔간독판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국민정부]]가 청해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이에 마부팡은 11월, 영하 지역의 여러 군벌들과 연합하여 쑨뎬잉을 공격했다. 쑨뎬잉은 영하로 주둔지를 옮겼다가 마부팡, 마훙쿠이, 마훙빈의 연합공격으로 박살나서 모든 병력을 잃고 [[쑹저위안]]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마씨군벌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신편 7사단을 신편 2군으로 개편하고 예하에 100사단과 2개 기병여단을 두게 했다. 그리고 마부팡을 2군장 겸 100사단장으로 임명하여 2만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했다. 1935년, [[대장정]] 중인 홍군과 교전했는데 이때 마부팡과 싸웠던 자가 바로 1방면군 섬감지대사령 [[펑더화이]]였다. 1935년 [[법폐개혁]]이 행해지자 이를 따르지 않고 청해성에서 기존의 은원을 계속 사용하는 등 국민정부의 통제력 강화에 저항했다. 마부팡은 삼촌 마린의 정권을 차차 위협, 청해성의 경제를 붕괴시키고 마린의 도덕적 해이를 고발하여 대중적 분노를 촉발시켰다. 궁지에 몰린 마린은 1936년 6월, 6개월 간의 휴가를 신청한 후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이때 마부팡은 청해성 주석대리에 임명되어 섬서성의 [[중국 공산당]] 토벌에 참여하는 등 군공을 세웠다. 1937년, 순례에 돌아온 마린이 청해성에 들어오려 하자 마부팡은 마린의 복직을 막기 위해 성정부기념주대회를 열어 마린을 공개적으로 탄핵했다. 마린이 공직에서 추방되자 1938년 3월, 장제스로부터 청해성 정부주석 겸 국민당 청해성 당부 집행위원회 주임위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청해성 경비사령부 사령, 청해성 보안처 처장, 국민정부군 82군 군장, 50집단군 총사령 등을 역임했다. 마부팡의 군대인 82군은 마치가 조직한 군대를 물려받은 것으로 산하에 잠편 2사단, 기병 5사단, 기병 8사단, 40집단군, 129군 등이 속해 있었으며 1949년까지 8만명 규모로 증강되었는데 전투력이 강력하여 서북철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기병 5사단은 과거 감수 기병 1사단이 모태가 된 것으로 [[반장전쟁]], [[초공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정예부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