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복림 (문단 편집) == 생애 ==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조건희 · 박훈상,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11217/42678548/1|신당동 떡볶이 ‘진짜 원조’ 마복림 할머니 별세… 며느리도 몰랐던 맛, 다섯 며느리가 잇는다]]", 「[[동아일보]]」, 2011.12.17.], [[8.15 해방]] 직후부터 남편과 같이 미군물품 보따리상을 했다. 어느 날 [[중국집]]에서 중국식 양념이 밴 떡요리를 대접받게 됐는데, '이 음식이 맛은 좋은데 좀 느끼해서 칼칼한 양념이 더해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마복림 할머니 본인이 언론사에 밝힌 사실이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20700209127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2-07&officeId=00020&pageNo=27&printNo=23105&publishType=00010|#]]][* “중국집에 손님을 모시고 갔을 때, 비싼 음식을 먼저 먹기가 부담스러워서 가래떡을 먼저 먹으려고 하다가 가래떡을 [[짜장면]] 그릇에다가 떨어뜨렸는데, 짜장면 묻은 가래떡의 맛이 의외로 좋았다”라는 이야기도 있다.[[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515461.html|#]]] 하게 되었고, 이에 고추장으로 볶은 떡을 생각해내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부터 가래떡과 야채를 춘장과 [[고추장]]을 섞은 양념에다가 연탄불로 볶아내는 형식의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다. 이 당시에는 새로운 음식을 파는 군소 분식점 사장 정도였지만, [[떡볶이]]의 맛이 근처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신당동(서울)|신당동]]에서 값싸게 맛 볼 수 있는 별미로 유명해졌다. [[청계천]]이 복개된 이후로 손님이 더욱 늘면서 가게도 크게 확장을 해 나갔고, 근처에서 떡볶이를 파는 가게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형성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연탄불로 볶는 방식에서 가스불로 볶는 방식으로 요리법이 진화했다고 한다. 2008년부터는 투병생활로 인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으며, 2011년 12월 13일에 향년 91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 뒤에는 양념 제조 비법을 전수받은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집'을 상호로 가게를 이어가고 있으며 신당동 일대에서 분점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046893&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맛있는 녀석들]] 161회 즉석 떡볶이 편에 등장한 집이 바로 이 분의 둘째며느리가 운영하는 집인데, 둘째며느리의 증언에 따르면 "시어머니가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는 며느리들에게 양념비법을 절대 가르쳐 주지 않으셨고, 본인이 식당에서 사용할 떡볶이 양념 전량을 직접 다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며느리들에게 양념비법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CF에서 나온 말대로, 며느리도 모른다던 말이 단순히 마케팅을 위한 광고용 멘션이 아닌 정말 사실인 셈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집안일이나 요리법 등을 전수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였는데, 며느리에게도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법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