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린썬 (문단 편집) === [[호법운동]] === 1912년 [[중국국민당]] 창당 이후 가입했고 1913년 총선에서 4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13년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키자 강경한 무력 토벌을 주장했고 그해 7월, 쑨원이 대항해 일으켰던 [[계축전쟁]]에 가담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쑨원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4년 [[겨울]]에는 [[중국 국민당]]의 전신인 중화 혁명당의 [[미국]] 지부 총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했다가 전국적인 저항인 [[호국전쟁]]이 일어났다. 위안스카이는 제제 취소 후 급사하고 리위안훙이 국회를 부활시키면서 호국전쟁은 끝났고 린썬은 [[쥐정]] 등과 함께 구 국민당의 강경파인 객려파를 영도하였다. 국회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장훈복벽]]으로 [[선통제]]가 복위하자 강제로 해임당했다. 복벽 진압 이후 [[돤치루이]]가 국회와 약법 회복을 거부하자 [[1차 호법운동]]이 벌어졌고 1917년 [[호법전쟁]]이 일어나 [[광저우]]에서 쑨원이 군 정부를 수립하자 광저우로 가 외교부장에 임명되었고 쥐정 등과 함께 민우사를 조직, 쑨원을 옹호하며 북방과의 화의를 거부하고 강경한 무력토벌을 동의했다. 쑨원 축출 이후 1918년 6월 12일 참의원 의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익우사와 연합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정, 부총통 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천춘쉬안]]의 정학회의 방해로 실패했고 정학회의 전횡에 불만을 품어 중의원 의장 [[우징롄]]과 함께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의 쑨원과 합류했다. 1920년 [[2차 호법운동]]으로 2차 광동 군정부가 수립된 후 민우사 요인들을 거느려 호법정부에 합류, 1922년에는 [[푸젠성|복건성]] 성장(省長)이 되었으나 얼마 안 가 사임하고 건설부장이 되었다. 1922년 [[영풍함 사건]] 이후 임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직예군벌]]들이 옹립한 [[리위안훙]] 총통이 구 국회 회복을 선포하면서 참의원 의장으로 거론되었으나 1919년 보선 의원의 자격을 취소하게 되면서 1917년 선거에서 당선되었던 왕가양이 의장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