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린뱌오 (문단 편집) == 평가 == >"'''린뱌오는''' 전장(戰場)과 초연(硝煙), 선혈과 생명이 오가는 곳을 갈망하는, '''당대의 [[한신]](韓信)이다.'''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울 날이 멀지 않았다. 청사에 남을 공을 세울 테니 두고 봐라." >---- >― [[장제스]], 1937년 제2차 [[중일전쟁|대일(對日)]] [[국공합작]] 당시 군사회의 석상에서 전쟁에 있어서는 매우 뛰어난 장군이었고 전략적인 식견도 있는 인물이었다. 매사에 자신감이 부족하고 내성적, 소극적 성격이어서 용장(勇將)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지장(智將)으로서의 면모는 탁월했다 할 수 있다. 호사가들이 군사적으로 뛰어났지만 [[토사구팽]] 당한 점 때문에 [[영포]]나 [[한신]]에 비유하기도 한다. 린뱌오의 경우 논란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섬기던 주군(마오쩌둥, [[한고제|유방]])을 상대로 반란을 도모하려다 실패하여 최후를 맞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국공내전 당시 린뱌오가 도시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펑더화이는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마오가 린뱌오의 손을 들어 도시에서 철군해 농촌으로 이동한 뒤 농촌의 지주들을 숙청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국공내전의 흐름이 바뀐 일을 보더라도 그의 식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린뱌오를 '''"장군 15명을 합쳐도 린뱌오 한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고 극찬했고, 적이었던 [[장제스]]는 '''"저놈은 전쟁의 [[마귀]]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사실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부터 린뱌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황푸가 배출한 가장 우수한 군사가는 4기생 린뱌오"'''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린뱌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장제스는 중공의 팔 하나가 잘렸다고 평했다.] 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5월에 린뱌오가 동북([[만주]]) 지방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린뱌오가 갔다면, 앞으로 동북은 편할 날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린뱌오는 동북지방을 초토화시켜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군사적으로는 천재였지만, 정치적 안목과 역량은 상당히 부족하였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카리스마, [[저우언라이]]의 중후함, [[덩샤오핑]]의 비전 같은 것을 갖추지 못했으며, 기껏해야 군 사령관 정도의 재목이었지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펑더화이]]에 비해서도 정치적인 안목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인데, 펑더화이는 인민을 걱정해서 마오에게 쓴소리를 하다가 실각한 반면에 린뱌오는 마오의 충실한 개 노릇을 하다가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마오를 배신했다가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되기 힘들다. 그래서 펑더화이는 마오 사후 복권되었으나 린뱌오 및 그 일당은 아직까지도 반혁명집단으로 남아있다.[* 실제 중국 정부에서도 문화대혁명의 주요 책임을 마오쩌둥의 아내인 장칭이 주축이 된 4인방과 린뱌오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도 린뱌오에 대해 '복권은 안 되어도 펑더화이처럼 어느 정도 능력적인 부분은 재조명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 때문인지 80년대만 해도 린뱌오는 각종 항일영화나 국공내전 관련 영화에서 그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90년대부터는 그래도 나오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