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린뱌오 (문단 편집) === 국방부장 취임 및 문화대혁명 === 건강 때문에 정치나 군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던 린뱌오는 [[1959년 루산회의]](庐山会议)에서 펑더화이가 몰락하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루산회의에서 린뱌오는 펑더화이가 흐루쇼프의 첩자라고 암시하는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으며 "펑더화이에 따르면 나는 순장(인민공사, 토법고로 등등)을 일삼아 후손이 끊어진 처지나 다름 없네? 펑더화이 때문에 내 아들이 조선에서 죽었고 남은 아들 하나는 미치광이다!" "펑더화이는 수정주의에서 고작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수준의 폭언까지 쏟아붓던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더욱 총애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자신을 비판한 펑더화이를 축출하고 펑더화이가 맡던 [[국방장관|국방부장]]직을 린뱌오에게 주게 된다. 이때부터 린뱌오는 '''마오를 잘 잡아야 권력이 온다'''라는 신념이라도 생겼는지 본격적으로 마오의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 당시 그가 마오쩌둥에게 아첨하기 위해 펴낸 책이 그 유명한 [[마오쩌둥 어록]](정식명칙: 마오주석 어록)이다. 이 서문에서 린뱌오는 "마오쩌둥 주석은 천재이며, 그의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만마디의 말에 맞먹는다."라는 소리를 했다. 이런 가운데 [[1962년]] 중국과 인도 사이에 국경분쟁([[중인전쟁]])이 발생하고 양측이 충돌하자 린뱌오는 다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인도군을 격파했다. 린뱌오는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 이후에도 오글거릴 정도의 마오쩌둥 숭배를 멈추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마오쩌둥의 견해는 계속해서 추종하였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서 실권을 발휘하고 싶었던 류사오치는 린뱌오를 제거하기 위해서 허룽 및 뤄루이칭과 연합하려 했고 린뱌오가 곧 국방부장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암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를 포착하고 린뱌오와 연합하여 류사오치를 회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린뱌오는 재빨리 문혁파의 선두에 서서 당내의 마오 반대파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다. 린뱌오는 "해서파관의 저자 우한은 마오주석에 반대하는 반동이며, 그를 옹호하는 자들 역시 모두 반동이다"라며 베이징 시장 펑전을 비롯한 베이징 시 당위원회와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 문화혁명 오인소조를 공격했다. 19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유일한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등극하였으며, 자신을 몰아내려 한 [[류사오치]]를 1967년부터 물고 늘어져 결국 류사오치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마오는 1962년 이래 잃었던 정권을 되찾았으며, 이로 인해 마오는 린뱌오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져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월 역류]], [[7.20 사건]] 등 굵직한 정치적 격변을 거치며 2인자 자리를 굳혔다. 한편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는 몹시 미워했지만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고 덩샤오핑에게 린뱌오와 같이 자신을 숭배하고 류사오치와 단절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덩샤오핑은 생존을 위해 린뱌오와 접촉했지만 주석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자기 하나이길 원했던 린뱌오는 덩샤오핑을 인민의 적으로 공박하였다. 다만 국방부장으로 있었으면서도 후계자 자리를 굳히기 위해 문화대혁명파와 홍위병이 인민해방군과 군부 실세를 공격하는데 방관하거나 협조함으로서 아들 린리궈가 지배하고 있던 공군을 제외한 군내 영향력은 줄어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