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린뱌오 (문단 편집) === 항일전쟁 및 제2차 국공내전 === 2차 [[국공합작]]이후, [[1937년]] 9월 린뱌오는 [[팔로군]] 115사단장이 되어 산시성 핑형관에서 일본군 제5사단 21연대 소속 치중부대를 매복공격해 궤멸시키는데 이것이 [[백단대전]]과 함께 공산당의 양대 승전으로 유명한 [[평형관 전투]]다. 하지만 핑싱관 전투 자체는 엄청난 승리로 언론에 선전된 것과 달리 공산당의 전과가 그렇게 보잘것 없었고 이런 핑싱관 전투 규모의 싸움조차 공산당은 후에 벌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말을 타고 국민당군의 수비 지역을 지나가다가 그를 [[일본군]]으로 오인한[* 오인하게 된 경위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노획한 일본군의 외투를 입고 있어서 오해했다는 설,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 여하튼 린뱌오가 해당 구역을 지나간다는 소식이 아래 병사들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은 동일하다.] 국민당군 초병의 사격으로 큰 부상을 입고(...) 옌안으로 후송되었다가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까지 간뒤 [[1942년]]까지 요양해야 했다.[* 해당 병사는 문책당하여 총살당할 뻔했으나 린뱌오가 양해해서 넘어갔다고 한다.] 이후 부상 후유증[* 치료 과정에서 [[모르핀]] 중독에 빠졌다는 설도 있다.~~[[헤르만 괴링|괴링]]??~~]으로 전선에서 활약하지는 못하고 항일군정학교와 중앙당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일어난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은 본부인 옌안이 함락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린뱌오가 다시 전선에 투입되어 [[동북항일연군]]을 개편한 [[둥베이]] 인민해방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만주]]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린뱌오는 1948년 10월, 창춘 공방전에서 창춘에 농성중인 국민당군을 포위했는데, 포위망에서 민간인 피난민의 도피를 막으면서 식량이 떨어지게 하는 전법을 사용하여 민간인 아사자가 수만 명이 발생했고,[* 공산군이 6월부터 국민당군 10만 명을 포위했는데, 보급로가 끊긴 국민당군 사령관인 정동국(鄭洞國) 소장은 포위망 내의 민간인에게 식량을 징발했고, 민간의 식량도 다 떨어진 10월이 되어서야 9만 5천명의 포로를 남기며 항복했다. 국민당측에서는 많게는 60여만 명의 아사자가 났다고 주장하고, 한국의 밀-역덕에 많은 영향을 준 디쾨터같은 반중공-친장제스 역사가는 국민당측 소스를 인용하여 약 20만까지 잡고 있지만, 중공측은 포위망내 민간인 인구가 40만 명이었으며 약 5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http://world.huanqiu.com/exclusive/2018-06/12171639.html|#]] 항복한 국민당군 사령관인 정동국은 이후 감옥에 갔다가 풀려나 중공 정부 수리부에서 일하면서 88세까지 장수했지만, 창춘 포위전에서 일찍 항복하지 않아 민간인을 희생시킨 것에 대해 매우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식량이 떨어진 국민당군은 결국 항복했다. 이렇게 되자 국공내전은 공산당쪽으로 흐름이 기울게 되었고 린뱌오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1949년]] [[베이징]]을 함락시킨데 이어 [[1950년]]에는 [[광시성]]까지 내려가 [[장제스]]를 [[대만]]으로 쫓아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공으로 린뱌오는 당과 군에서 고위직에 올랐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