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린리궈 (문단 편집) === 연합함대 결성과 571 공정 === 1970년 10월, 자신을 사령관이라 부르며 추종하는 젊은 장교들과 함께 린뱌오에게 충성하는 조직인 조사연구소조를 개칭하여 <연합함대>로 바꾸어 예췬의 후원을 받았다. 예췬 역시 연합함대 일원들에게 자작부인으로 불리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사연구소조가 연합함대로 개칭된 이유는 린리궈가 일본 영화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우리도 연합함대다. 우리도 에타지마 정신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린리궈는 연합함대의 영향권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지에 소조를 설립하고 비밀거점을 설치하였으며 무기, 통신장비, 기밀문서 등을 수집하였다. 1970년 강서성 루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린뱌오의 동맹자였던 [[천보다]]가 숙청당하고 마오쩌둥이 린뱌오가 주장한 천재론과 국가주석직 부활 제안을 격렬히 비판하자 린리궈는 9기 2중전회가 마무리될 때 쯤에 "이번 투쟁은 장기간 지속될 것 같다. 우리는 군대를 주도하여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이후 린뱌오와 마오쩌둥의 관계가 연일 악화되자 린리궈는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일해 온 정치세력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그의 전직 비서들은 자살했거나 체포되었다. 그와 가까운 그소수의 전우들이나 신뢰할만한 참모들 또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감옥에 보냈다. (...) 그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디스트다. 누군가를 제거하는 데 있어서 그의 소신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거나 일단 시작하면 철두철미하거나 둘 중 하나다. 누군가를 제거할 때마다 그는 상대가 죽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일단 상처를 주기 시작하면 끝까지 상처를 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쁜 일에 대해서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린다." 이 때문에 린뱌오와 그 측근들은 1971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긴급회동을 가졌다. 그는 정세에 대해 분석하여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의 문인역량이 확대되고 있는데 이렇게 가다보면 장춘차오가 린뱌오를 쫓아내고 마오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가지 방안을 논의한 끝에 린리궈는 [[571 공정]]이라 불리는 마오쩌둥 암살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3월 31일, 린리궈는 지휘부를 수립하고 상하이에서 전 난징군구 공군 정치위원 장텅자오, 공군 4군 정치위원 왕웨이궈, 공군 5군 정치위원 천리윈, 난징군구 공군 부사령원 저우젠핑 등을 소집하였다. 린리궈는 저우젠핑이 난징에서, 왕웨이궈가 상하이에서 책임을 맡기로 하고 천리윈을 두목으로, 장텅자오를 총책임자로 삼았다. 4월에는 왕웨이궈를 시켜 상하이에서 교도대를 수립하게 하였다. 린리궈는 7월 상순에 이르러 마오쩌둥과 [[에드거 스노우]]의 대화를 들어 린뱌오를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연합함대의 성원들도 린뱌오를 반대하는 바람이 도처에서 불고 있다고 거들었다. 7월 하순, 린리궈는 광저우, 선전 등지에서 지형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북대하에서 수륙양용장갑차 운용을 공부하면서 무력봉기를 준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